가을이 깊숙이 지나가고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이 잎새를 떨구고 있다. 지금은 떠나갈 때인 것을 아는 그 담담한 흩날림이 죽음이란 생명의 질서를 위한 또 하나의 정화작용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자연은 그렇게 또 제 스스로 제 몸의 정화를 시작한다.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생의 그 많은 목표들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그것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희생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인생이란 과정이지 목표가 아니기에 말이다.

그 일 그 일에 일심을 다하는 것이 공부이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일상의 사물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다. 삶의 깨달음과 지혜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겨울로 가는 길목,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실을 바라보는 일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목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멈춰 서서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바라보는 일 또한 달리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기에 거기서 진정한 길이 보이리라고 믿는다.

오늘 아침 구봉산을 오르면서 마음이 조금 쓸쓸했다. 사실은 오랜만에 접사렌즈를 가지고 올라가 가을꽃을 찍으려고 했는데, 마음은 꽃보다 자꾸 낙엽에 가는 것이었다. 아침햇살이 관목들 사이로 비치고 바람도 적당했다. 낙엽을 밟으며 산을 오르는데 나무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낙엽을 밟아도 되는 것인지 최대한 숨을 단전에 모으고 천천히 올랐다. 나무에 따라서 낙엽을 밟는 감촉도 다르게 느껴졌다.

 

침엽수를 밟을 때는 마치 융단을 밟을 때처럼 푹신하고 경사면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도 미끄럽지 않았다. 참나무에 떨어진 낙엽을 밟을 때 ‘사각’거리는 소리는 낮은 ‘시’음(音)을 연상케 한다. 낙엽은 바람이 부는 대로 움직였다. 이미 나무 이파리로서 생명을 다했지만, 바람이 이끄는 데로 자유로웠다. 바위에 떨어진 낙엽도 있고, 돌밭에 떨어진 것도 있고, 나무 등걸에 떨어진 것도 있고, 오솔길에 떨어진 것도 있고, 관목 사이에 떨어진 것도 있었다. 그러다 또 바람이 불면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다.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은

모든 세상을 맑은 눈으로 보게 한다

바람은 한줌의 가식도 위선도 용납하지 않고

잠들어버린 양심을 흔들어 깨운다

꽃을 흔들어 사랑을 눈 뜨게 하고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은

닫혀진 마음의 벽을 헐게 하고

차디찬 마음에 더 기운을 부어준다

흘러가는 세월만큼

바람은 한군데 머물지 않는다

어느 곳으로 흘러가던

바람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은

숲의 무성한 날들의

싱그러운 흔들림의 기쁨과

아무 것도 가릴 것 없어 떨고 서 있는

나목(裸木)의 아픔을 이미 알고 있다

-박철. ‘바람‘

 

사진기를 바짝 갖다 대면 아무 생명이 없는 것 같은 낙엽은 얕은 개울물의 송사리처럼 파르르 떤다. 그 떠는 모습이 애처롭다. 표정이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화려하진 않지만 할 일을 다하고 사라지는 것이니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낙엽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겠지. 그러나 낙엽은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라, 거름이 되어 나무를 더욱 튼실하게 자라게 할 것이고, 또 다른 생명의 인연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문득 윤동주 시인의 ‘무서운 시간’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윤동주 ‘무서운 시간‘

 

조금 쓸쓸한 아침 산행이었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저 자연의 순리(順理)에 맞춰 더욱 몸과 마음을 낮추며 살아야 하겠다는 간단한 뉘우침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