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국의 비판세력은 외세와 독재정권, 자본과 재벌을 비판하는 데 바빠서 유교를 중심으로 한 전통과 ‘문화적 문법’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이야기하면서 ‘우리 안의 문화적 문법’은 말하지 않았다.”

이 책은 1955년에 태어나 박정희 시대를 온전히 살아낸 뒤 한국의 대학 강단과 시민단체에 터를 잡았다가 지금은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초청연구원으로 있는 저자의 비판적 ‘한국인론’이다. 5년여 전 프랑스로 떠나며 한국인과는 만나지도 않고 한국말로 된 글은 보지 않는 등 가능한 한 연구 대상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는 그는 낯선 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한국사회 문제의 뿌리를 새롭게 깨달았다고 말한다. ‘문화적 문법’은 그 쓸쓸한 싸움에서 얻은 나름의 결론이다.

저자는 진보 지식인이건 보수 지식인이건 근본적으로 ‘문화적 문법’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것이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문화적 문법’은 “말을 할 때 문법을 의식하지 않고 말하듯 사회 속에서 행위할 때 의식하지 않고 행위하는 그 무엇으로, 심층에서부터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것”, 즉 ‘당연의 세계’다.

이는 12개 키워드로 요약된다.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속도지상주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 ▲수단 방법 중심주의 ▲이중 규범주의. 저자가 보기에 2005년의 황우석 사건은 이것들이 집약된 ‘종합선물세트’와 같다. 저자는 이러한 문화적 문법을 규정하고 있는 뿌리를 유교와 무교(무속)에서 찾는다. 결국 이 책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의 뿌리를 한국의 종교 전통 속에서 찾아보려 한 시도인 셈이다.

저자는 한국사회를 “심층의 무교－유교 결합체라는 전근대성과 표층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서구적 근대성이 서로 엇갈리며 결합돼 있는 상태”로 본다. 전근대성은 정부와 기업은 물론 종교 단체와 교육기관, 시민단체의 행위양식에까지 속속들이 스며있어 문제라고 느끼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심지어 2002년 월드컵 이후 이런 전근대성조차 우리의 강점이라는 논리마저 힘을 얻는 상황이다.

한국인 중 유교를 믿는다는 사람은 2%에 불과하지만 유교가 만든 문화적 문법은 거의 모든 한국인에게 공통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것부터 출세해서 가문을 빛내야 한다는 생각까지. 유교는 조선시대, 일제시대를 거쳐 권력과 질서의 유지, 국민동원에 적합한 이데올로기로 변질됐고 유교적 권위주의와 서열 의식은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공고해졌다.

이는 무교와의 결합으로 가능했다. 무교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살아남는 일’, 즉 ‘현세적 물질주의’이고 이는 ‘국가중심주의’로 이어진다. 저자는 “시민운동조차 국가정책을 비판하는 일에 큰 비중을 두는 정치적 시민운동의 성격을 보이는 한계를 보인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갈등회피주의’ 역시 무교의 조화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갈등이 제도화되지 못하고, 급진적인 생각은 애초에 꿈조차 안꾼다. 종교의 대의는 가족, 마을공동체 구성원의 안녕과 행복을 빌어야 했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 민족주의였다. 기독교는 해방적 영성의 힘을 포기하고 기존의 불의한 정치상황에 순응함으로써 현세의 부와 권력 추구를 정당화하며 양적 성장을 지속하는 세속화된 종교가 됐다.

저자가 내놓는 대안은 ‘진정한 개인주의의 확립’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기실 한국사회에서 진정 근대적 의미의 개인은 한 번도 확립된 적이 없다. 가족, 마을에서부터 민족, 국가, 계급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집단의 무게에 짓눌려서. 아울러 저자는 여성과 청소년이 중심이 된 ‘문화적 교양층’을 형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문화적 문법의 형성, 유지, 변화에 깊숙이 관여해온 사람들이 지배층 성인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제는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데가 내 고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서 어떻게 앉아 있어도 쓸쓸하지가 않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몹시 쓸쓸하다.” 저자가 책을 열면서 인용한 시인 김수영의 이 말은 언제나 집단 정체성 속에서 자신을 죽이고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하는 말이다. “한국인들이여, 좀더 쓸쓸해져도 괜찮습니다.” 1만8000원 (손제민기자)

한겨레 서평) 한국인 연고·권위·물질주의는 무교-종교 결합된 전근대성 탓
정수복씨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 “자율적 개인주의 증진이 대안”

	» 정수복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초청연구원

그가 논하는 문화적 문법이란, 이념이나 지역을 뛰어넘어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관습이나 관행, 습관, 가치관과 같은 것이다.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속도시장주의, 근거없는 낙관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이중규범주의가 그것이다. 긍정보다는 부정의 어감이 훨씬 강하게 풍겨온다.

 민주화 20년에도 견고한 성채처럼 요지부동인 이런 ‘문화적 문법’은 도대체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심층의 무교-유교 결합체라는 전근대성과 표층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서구적 근대성이 서로 엇갈리며 결합되어 있는 상태가 남한의 모습이다.”

 “‘무교-유교 응결체’가 문제”인 것이다. 무교, 도교, 불교, 유교 등 한국종교들은 상호공존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융합적 특성을 보였다. 극단적인 종교갈등을 피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지은이는 이런 융합의 길을 통해 ‘전근대적 문화적 문법’은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본다. 예컨대 무교의 현세주의적 세계관이나 조화론은 이후 도래한 불교와 기독교에서도 또렷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현세 부정의 요소를 갖고 있던 불교와 초월적 영역이 분명한 기독교가 무교의 이런 원리를 흡수해버린 것이다. 한국불교와 기독교가 ‘현실긍정의 논리’로 작용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기독교에서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가족이기주의와 연고주의는 유교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정 연구원은 윤리성의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지 않는 무교와, 조화를 강조하는 유교의 구체적인 사회윤리체계는 외부의 새로운 종교, 사상, 문화가 유입되더라도 쉽게 깨지거나 흩어지지 않는 딱딱한 결정체로 형성되었다고 정리했다.

 지은이는 대안으로 ‘개인주의’를 제시한다. 여기서 개인은 자유를 누리며 타인을 존중하고 사회 전체의 공공선을 생각하는 책임 있는 시민을 말한다. 그는 개인주의에 깊게 사로잡혔던 샤르트르가 2차대전이 터진 뒤 프랑스 공산당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했다면서, 자율적 개인이 존재할 때 자율적으로 스스로 개혁하고 개선할 수 있는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가정과 교실과 대중매체는 생각하는 개인을 존중하고 장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현세적 물질주의의 독주 규제를 위해선 기존 종교 개혁도 주요 과제라고 본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시민층 형성을 위해서는 문화적 교양층의 형성이 중요하다면서 시민운동도 이제는 개인 주체 형성과 문화적 교양층 형성을 통한 사적 영역의 변화를 주제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성만 기자 07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