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하얼빈》 (2024)

안중근 의사의 이름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단연코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사건일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본격적인 일본의 전방위적 침탈이 시작되고 그 주역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을 맡았던 시기, 안중근은 이 ‘늙은 여우’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이 극적인 사건의 시작을 영화는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벌어졌던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로부터 출발한다. 치열한 전투 끝에 큰 승리를 거둔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뜻밖에도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거하여 일본군 전쟁포로를 풀어주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수많은 동지들의 당연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에는 포로들을 풀어준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국 큰 화근으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풀어준 일본군 포로들이 독립군들의 위치를 발설하여 독립군 부대가 거의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말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중근이 만국공법을 근거로 일본군 포로들을 풀어준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순진하고 낭만적인 원칙주의자로서의 면모라는 비판도 있으나, 만국공법을 근거로 제시한 이유는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를 국가 대 국가의 전투로, 즉 대한제국을 일본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하나의 국가로 천명한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입장에서는 일본과 조선이 다르지 않은 하나의 국가일 테니 그렇다면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국가 대 국가의 전투가 아니라 내란범과 공권력의 전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었든 안중근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진다. 자신의 결정이 수많은 동지들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이 비참한 마음으로 시퍼렇게 얼어붙은 두만강을 홀로 건너며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결심을 다진다.

영화 속에서 안중근을 움직인 동력은 죄책감과 부채의식이다. 자신의 실수로 동지들이 죽었다는 죄책감, 그러기에 자신은 동지들의 목숨에 빚진 목숨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부채감, 이 두 감정이 영화 내내 안중근을 끝까지 추동하는 요인이 된다. 그런데 죄와 밀접하게 관련된 부채감, 빚진 마음이야말로 기독교의 정수가 되는 감정이기도 하지 않은가? 성경에서 죄는 늘 빚에 비유되곤 한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 준 너그러운 주인의 이야기(마 18:21-35)를 통하여 하나님의 죄 용서를 말씀하셨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이라는 것이다. 이 죄와 빚의 관계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등장한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문장은 우리말 성경의 의역이다. 이와 달리 헬라어의 원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해 준 것 같이 우리들의 빚을 탕감해 주옵시고”라고 말한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 지은 죄는 하나님께 진 빚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죄인인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빚진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에서의 죄책감은 빚진 마음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께, 동시에 동료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빚을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빚진 마음이 우리를 패배의식과 절망과 좌절로 이끌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신앙인 안중근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빚진 마음이 우리를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이끌도록 만들어야 한다. 죄책감이 우리를 무너뜨리게 해서는 안 된다. 빚진 마음을 사명감으로 승화시키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애써야 한다. 빚진 마음이 주는 또 하나의 미덕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아무리 대단해 보이더라도 그저 아주 작은 빚을 갚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빚진 마음은 얼마나 축복받은 마음인가, 우리의 죄를 사명감으로, 겸손으로 이끄는 마음이니 말이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롬 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