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정치철학>,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파주: 한길사, 2023)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주장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자주 주목받는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이다. 그러나 아렌트 사상은 이 개념 하나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생의 전반에 걸쳐 정치의 본질과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씨름하였다. 1958년 저술한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로 구분하였다. 이 세 가지 모두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영역에 속한다. 활동적 삶을 이처럼 구분하는 이유는 행위가 삶의 조건, 특히 정치적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인간의 조건』, 164쪽). 행위는 노동처럼 생존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작업처럼 생활의 필요에 따른 것도 아니다. 행위는 인간의 인간됨을 드러내는 활동 그 자체이다. 

  그런데 행위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지속된다(『인간의 조건』, 336쪽 이하 참조). 인간은 끊임없이 행위하며, 공동의 삶을 꾸려가기 위해 서로의 행위를 조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서로 다름을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으로 규정한다. ‘복수성’은 ‘다양성’(diversity)이라는 말보다 다름을 더 철저하게 표현한 것이다(김선욱 2017, 27쪽). 개성을 무시당하면, 갈등이 생기는데 이때 발생한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의 과제이다. 더 나아가 정치는 갈등 조정을 넘어 인간의 삶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아름다움의 영역에 속한다. 아름다운 정치를 위해서는 올바른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다. 이것은 아렌트가 1960년대 후반 뉴욕의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행한 ‘정치철학의 여러 강의’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사망 직전까지 작업했지만 결국 미완의 작품으로 남은 『정신의 삶』 제1권(사유)과 제2권(의지)에서는 정치적 행위자의 활동적 삶에서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의 관점, 즉 관찰자의 시점에서 정신이 활동적 삶 전반에 끼치는 영향을 밝힌다(『정신의 삶』 52쪽). 이것은 사유의 사유를 강조하며, 의지를 분리한 후기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반대이기도 했다. 아렌트는 정치적 행위에서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고, 의견에 기초한 판단이 공론장에서 올바로 작용하는가를 논하길 원했다. 이것은 『정신의 삶』 3권인 ‘판단’에서 다룰 주제였다. 하지만 제3권(판단)은 생존에 출간하지 못했고, 사후 『칸트의 정치철학』이라는 유고작품으로 1978년 출간된다.    

  『칸트의 정치철학』에서 “아렌트는 정치적 판단을 다루며,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크게 활용한다.”(김선욱 2017, 170쪽) 정치는 실천의 영역이기에 『실천이성비판』이 정치철학에 더 적절한 텍스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녀가 『판단력비판』을 활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이 책은 칸트의 정치철학이 숨어 있으며, 개인이 제시하는 의견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고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의 정치’로 독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란 판단의 소통 가능성을 가지고, 좋은 인간이 되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을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칸트의 정치철학』, 158쪽). 

  달리 말해 공통감은 ‘공동체 감각’(gemeinschaftlicher Sinn)을 의미한다. 여기서 감각은 정신을 반성한 결과를 의미하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반성은 마치 감각 작용인 것처럼, 즉 차별적이고 선택적인 감각인 것처럼 영향을 준다. 일반적으로 개념의 매개 없이 소통하게 만드는 판단기능”으로 작용한다(『칸트의 정치철학』, 160쪽). 공통감은 아름다움이나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미적인 판단과 유사하다. “칸트를 이용하는 아렌트는 공통감이 적어도 이성적 사유 능력처럼 타고난 능력이라기 보다는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김선욱 2021, 199쪽)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이 되기 위해 복수성(plurality) 곧, 사회성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복수성의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살며 상식과 공동체 감각을 가지고 지구에 사는 생명체이다.”(『칸트의 정치철학』, 84쪽) 정치 행위자인 인간은 타인을 늘 동반해야 하고, 상호 간의 의견을 수렴하고 조율해야 하는 정치적 판단력이 요청된다. 정치적 판단력은 일종에 비판적 사유를 의미한다. 비판적 사유란 “배워서 알게 된 자기 자신의 생각에 비판적 기준들을 적용함으로써 배우게 되는 사유이다.”(『칸트의 정치철학』, 110쪽). 그리고 이러한 적용은 공공성, 즉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만날 때 발생하며, 검증 없이는 학습될 수도 없다. 

  더 나아가 정치 판단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상식과도 연결된다. 상식이란 사적인 감각과 구별되는 공동체 감각이다. 이것은 불편부당성(impartiality)을 가지고 타인을 고려하며 자신의 생각을 확장하는 것이다. 정신의 확장은 “우리의 판단을 타인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가상적 판단과 비교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칸트의 정치철학』, 112쪽). 

  그래서 아렌트는 칸트의 정치철학 강의 마지막에 『판단력 비판』에서 말한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확장된 정신을 가지고 아름다운 정치를 위해 자신의 상상력을 늘 훈련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공통감을 가지고 타자의 의견을 상상하고, 더 나은 세상을 생각해야 한다. 상상력이 없다면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뿐만 아니라 타인들과 소통 가능한 세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칸트의 정치철학』, 180쪽). 

  아렌트가 『칸트의 정치철학』까지 평생에 걸쳐 주장한 아름다운 정치란 인간의 복수성, 개성, 자발성을 인정하는 정치이다. 그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의 삶 속에 정치적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반대로 전체주의는 세계 시민으로서 인간의 공통감을 무시하고, 소수의 이념을 마치 다수의 의견으로 둔갑시키는 사이비 정치이다. 만일 올바른 정치를 위한 판단력을 상실한다면, 그 사회는 극단적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경직되고 말 것이다. 또 다른 전체주의의 위협으로 ‘아름다운 정치적 판단력’을 부정당하는 이 시대에 『칸트의 정치철학』을 권한다.  
     
<참고도서> 
아렌트, 한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김선욱 옮김. 파주: 한길
사, 2006.
아렌트, 한나. 『인간의 조건』. 이진우 옮김. 파주: 한길사, 2015.
아렌트, 한나. 『정신의 삶: 사유와 의지』. 홍원표 옮김. 서울: 푸른숲, 2019.
김선욱. 『한나 아렌트의 생각: 오늘 우리에게 한나 아렌트는 무엇을 말하는가』. 파주: 한길사, 2017.
김선욱. 『한나 아렌트와 차 한잔: 그의 사상과 만나다』. 파주: 한길사, 2021.
   
송화섭 목사(꿈의교회 부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