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무정' (서울:문학과지성사, 2005)

“예술가와 예술 작품은 분리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첨예한 갈등을 만들어 내지만, 최근엔 “예술가와 예술 작품은 분리될 수 없다”가 주류 의견인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요즘엔 “예술 작품”보다 “예술가”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문학을 예로 들자면 작품의 내용, 깊이, 완성도보다는 ‘어떤 작가’가 썼는지, 그 작가가 어떤 신념과 사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삶을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 어떤 작가의 사상과 삶이 나와 비슷하다면 그 작가의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과 반대된다면 읽지도 않고 비판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하지만 만약 한 작가가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으나 이후에 비도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행동이나 범죄를 저질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훌륭한 문학 작품을 썼지만 이후 친일파나 군부독재를 옹호하는 사람으로 변절했다면, 그 작가가 변절하기 전에 썼던 작품도 읽지 말아야 할까?

“작가가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쓰였던 작품들은 죄가 없다”라고 말할 수는 있으나, 어딘가 껄끄러운 마음이 든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친일파나 군부독재를 옹호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시대의 어두움을, 한 인간의 어두움을 외면하는 것이 정말로 올바른 자세일까? 한 시대 혹은 인간의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애써 과오를 외면하고 망각하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되는가? 내 생각엔, 시대의 어두움을 외면하고 망각하려는 자가 역설적으로 그 어두움에 물들 가능성이 가장 높다. 따라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어두운 부분마저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친일파로 변절한 이광수’가 쓴 󰡔무정󰡕을 읽는다는 것은 적어도 한 가지 의의가 있다. 바로 당시 한국인들의 욕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당대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지난 세기 이래 한국인들이 어떤 욕망에 들려 있었던가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정밀한 거울이다.”(507)

더 나아가 어쩌면 이광수의 변절 이전과 이후를 생각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광수는 1917년 󰡔무정󰡕을 발표한 뒤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해에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39년 ‘복지황군위문’에 협력하고 창씨개명을 하는 등 친일파로 변절했다. 과연 그의 변절은 이미 예상되었던 행보인가 아니면 극적인 변절인가?

여기서 󰡔무정󰡕의 전체 내용 및 주제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무정󰡕의 마지막 부분만 언급하고자 한다.

이 책 후반부에서 이형식과 김선형은 미국으로, 김병욱과 박영채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기차를 탄다. 그들은 우연히 같은 기차를 타게 되는데,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호우 탓에 기차 선로가 파손되어 잠시 삼랑진역에 하차하게 된다. 그들은 그곳에서 호우로 부서진 집들, 집이 잠겨 밖에서 비를 맞고 있는 이들,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보게 된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선 음악회를 열고 돈을 마련한다.

이후 형식은 세 사람에게 “여러분은 오늘 그 광경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461)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병욱은 “‘불쌍하게 생각했지요’하고 웃으며 ‘그렇지 않아요?’”(461)라고 말한다. 형식은 그 원인이 문명이 없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에 형식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 저들을 구제할까요?”(461)그러자 병욱은 자신 있는 듯이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461)라고 답한다. 어떻게? “‘교육으로, 실행으로’”(462) 그렇다면 교육과 실행으로 저들을 가르칠 자들은 누구인가? 세 여성은 “우리가 하지요!”(463)라고 답한다.

이제 이들은 “우리는 장차 무엇으로 조선 사람을 구제할까 하고 각각 제 목적”(466)을 말한다. 그리고 󰡔무정󰡕의 마지막은 이들이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다는 것을 알리며 이들이 돌아오면 조선이 더욱 진보할 것이라는 부푼 희망을 안고 끝난다. 그리고 이광수는 나레이션을 통해 무정을 마무리한다.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473)

내 생각엔 바로 이 결말이 󰡔무정󰡕이 지닌 명백한 한계이면서 동시에 지난 백 년간 한국인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우선 다시 한 번 결말 부분을 살펴보자.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들은 수재민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도와준다. 그들이 다시는 같은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본인들이 힘과 문명을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수재민들을 도와준 것인가? 분명 그들은 자원해서 환자들을 돌봤고 수재민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도 열어 돈도 주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는 단순한 동정심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들이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다른 입장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연재해로부터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앞으로도 입지 않을 것이기에 수재민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삼랑진역에는 아직 수재민들의 고통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선 활동은 수재민들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또한 이후 자신들의 힘으로 민족을 계몽하겠다는 다짐은 지난 백 년간 ‘근대화’를 동경하면서 ‘엘리트주의’로 살아갔던 한국인들의 초상을 또렷이 보여준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 지독한 가난을 타파할 힘으로 한국인들은 근대화와 계몽을 꿈꿨다. 이에 몇몇 사람들은 깨어 있는 소수가 다수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욕망이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라도 결국엔 뒤틀려버렸다. 개인보다는 민족이, 부분보다는 전체가 중시되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시민을,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 노동자를 희생시켰다. 누군가의 희생은 더 나은 시대와 환경으로 가기 위한 반드시 지불할 수밖에 없는 통행료라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근대화’라는 욕망의 기차를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광수의 변절도 󰡔무정󰡕에서 이미 어느 정도 예기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무정󰡕이라는 거울은 지난 백 년간 동안의 한국인의 초상과 오늘날 우리의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거울을 통해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확인했으니, 이 문제에 대해 답을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김윤형(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