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데이션(gradation)'이라는 용어를 대학교 교양 과목으로 수강했던 사진 수업에서 처음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이나 사진 따위에서, 밝은 부분부터 어두운 부분까지 변화해 가는 농도의 단계'를 의미하지요 ‘옮을 이(移)’자를 사용해서 우리 말로 ‘명암의 이행(移行)’이라고도 합니다. 

화선지에서 먹물이 번져나가다가 결국 하이얀 여백과 하나가 되듯 시각 예술에서 그러데이션이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움'입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자연 속에는 언제나 그러데이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풍든 잎새 하나에도, 군락을 이룬 작은 숲에도, 숲과 숲이 모여 이룬 가을 산에도 가을의 색채는 이행되어 그러데이션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번 가을을 보내면서 저는 특별한 그러데이션을 경험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이나 그림처럼 한 순간, 한 장면 속에 담긴 그러데이션이 아니라 순간을 넘어 시간의 덩어리 위에 새겨진 가을의 그러데이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린 것이지요. 

영혼의 눈이 있다면 그 눈의 조리개를 활짝 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024년 가을이라는 시간의 덩어리와 그 위에 덧입힌 가을을 그러데이션을 한껏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러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을의 한자락 한자락을 꼭 붙들고 살았고 가을의 순간 순간을 충만하게 만끽하면 살았기 때문이었지요. 

올 가을, 유독 흘러가는 시간들이 애달프게 느껴졌습니다. 가을 초입의 어느 날, 영생하도록 솟아내는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건만, 생명으로 채우지 못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문득 죄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언제 어떻게 끊겨 버렸는지도 아득할 뿐 복음 생명의 자연스러운 그러데이션은 사라져 버리고 이벤트만 가득한 신앙생활, 아니 '교회활동'에 대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을의 하루 하루, 그 날의 소중함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가을이야말로 그 어떤 계절보다 그러데이션의 변화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원한 가을, 찬란한 가을, 고운 가을, 화려한 가을, 흑백의 가을, 촉촉한 가을, 음습한 가을, 외로운 가을, 정겨운 가을, 따스한 가을, 시린가을...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올 가을도 정신 없이 살다가 고작 한 두번 혹은 두서너번 가을을 느끼고는 이내 가을을 보내 버릴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생의 그러데이션을 놓쳐버린채로 몇 장의 스냅사진만을 남기고 인생을 끝낼 것이며 그마저 '고엽'처럼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북풍에 흩날려 사라져버리고 말겠지요.  

하지만 가을처럼, 자연스러운 그러데이션이 있는 우리 인생이라면 바스라지고 사라진다 한들 그래도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하루 생명의 일에 집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그러데이션의 이행 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눈을 뜨고 그 조리개를 활짝 열어 인생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을의 그러데이션이 가장 잘 담겨있는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사계'중 '10월'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보다 비발디의 사계가 더 친숙하지만 비발디의 사계에는 콘트라스트가 있을 뿐 그러데이션은 없습니다. 러시아의 가을은 우리보다 빠르기 때문에 이맘때 듣기에 딱 좋은 음악이 아닐까 싶습니다. 

피아노 독주나 실내악 연주도 있지만 이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연주로 듣는 것이 원곡의 악상과 가장 잘 어울립니다. 그중에서도 다닐 샤프란의 연주는 한 순간도 끊기지 않는 가을의 그러데이션을 이후의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짙은 농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66eBS42l1Tg?si=h9zAfzaBZtnC5o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