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역사와 정치와 구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지음, 성염 옮김, 분도출판사, 2000)

  며칠 전 20세기 해방신학의 거장이 96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바로 페루 출신의 도미니칸 수도회 신부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érrez, 1928.6.8.~2024.10.22.)이다. 구티에레즈는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해방신학이라는 신학을 태동시켰다. 그의 주저인 『해방신학』은 20세기 후반 다양한 해방 운동과 이론의 모태가 되었다. 하지만 1977년 우리나라에 초판이 출판되었을 당시 『해방신학』은 금서였다.  

  2000년대 초 『해방신학』은 점차 주목을 잃어가는 시기였지만 나는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실천에 대한 신학적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신학에 관심이 있던 나에게 지도교수님은 생소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해방철학자인 엔리케 두셀(Enrique Dussel, 1934.12.24.~2023.11.5.)을 소개해 주었다. 교수님은 독일 유학 시절 어느 심포지엄에서 유럽 신학자들과 이론적으로 밀리지 않는 엔리케 두셀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며, 두셀의 해방철학으로 석사논문을 작성해 보라고 권했다. 두셀을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자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구티에레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처음 접했을 때 정치 이데올로기나 철학에 기반한 책이 아니라는 점에 놀랬다. 『해방신학』은 어느 신학 저서보다 교회 중심적이고 억압받는 자들의 구원에 관심을 둔 책이다. 

  특히 구티에레즈는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 교회의 역할을 말하며, 평신도들의 역할을 강조한다(115쪽). 그가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변혁이 교회 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속한 역사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인 삶의 현실에서 복음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제와 평신도 모두 자신들이 직면한 억압적 상황과 철저하게 대결해야 한다. 이 대결의 중심에는 가난한 자들을 편드는 선택이 자리 잡고 있다(142쪽). 가난한 자를 편드는 것은 교회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사명이다. 

  가난한 자를 편드는 선택의 핵심이 바로 ‘해방의 영성’이다(231-238쪽). 우리는 대개 영성 하면 정신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해방의 영성은 물질과 정신, 영혼과 육체, 현실과 하나님 나라를 이원화하여 보지 않는다. 해방의 영성은 물질과 정신을 총체적으로 본다. 그것은 복음적 실천이자 성령의 지배를 말한다. 복음적 실천을 구체적으로 옮기는 행동이 바로 ‘자발적 가난’이다. 자발적 가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난의 ‘삼중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첫 번째 가난은 ‘물질적 가난’을 가리킨다(318쪽. 물질적 가난이란 “인간 생활을 인간답게 영위하기에 필요한 경제적 재화의 결핍을 말한다.”(318쪽) 구조적인 범죄로 인해 일어난 가난을 의미한다. 물질적 가난을 타파하기 위한 두 번째 가난은 ‘복음적 가난’이다. 복음적 가난은 성서가 증언하는 가난이다. 구티에레즈는 신구약에서 증언하는 복음적 가난의 의미와 하나님의 편드심을 설명한다(321-332쪽). 세 번째 가난의 개념은 ‘자발적 가난’이다. 자발적 가난이란 물질적 가난을 타파하기 위해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는 가난이다. 즉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solidarity)를 말한다. 복음적 가난의 체험은 우리를 자발적 가난으로 인도하며, 물질적 가난을 치유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우선적인 선택”으로 인도한다. 

  나아가 가난한 자를 편드는 것은 가난한 자를 구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구티에레즈는 가난한 자를 편드는 ‘선택’(option)에서 선택의 의미를 “자유로운 결정의 위임”이라고 지적한다. 복음화를 위한 자유로운 위임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 가난한 사람의 세계로 매일의 자발적 투신과 깊어지는 연합의 자리로 말이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편들고 결속하는 ‘해방의 영성’은 누군가를 정복하고자 하는 거짓 자아와 사회 구조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달리 말해 무수한 이웃들(others)과 세계를 정복하는 불의에서 결별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Other)을 만나도록 개방한다. 이것이 구티에레즈가 남긴 해방의 영성이다. 

<참고도서> 
『메델린 문헌: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단 총회 최종 결의』. 김수복・성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89.
『푸에블라 문헌: 제3차 라틴아메리카 주교단 총회 최종 결의-라틴아메리카의 현재와 미래의 복음화』. 성찬성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1.
                    
송화섭 목사(꿈의교회 부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