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주제이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첫 작품은 <순례자>인데, 1986년 산티아고 순례 후 썼다. 이듬해 발표한 <연금술사>는 작가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길은 단지 걷는 여정일 뿐 아니라, 영혼의 순례를 의미한다. 코엘료가 쓴 순례기를 시작으로 해마다 야고보의 길은 끝없는 순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공통점은 먼저 걷는 데서 시작하지만, 목적지는 저마다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 있다.

  순례기는 끝없는 자연의 길을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경관과 풍광으로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나 어느새 장면이 바뀌어 결국 깊이 감춰진 자신을 드러내면서 순례의 여정은 반전을 거듭한다. 더 이상 걷는 길이와 소요 시간은 주요한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성취감은 있지만,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산티아고 순례만 하더라도 그 경로가 프랑스 생장에서 콤포스텔라 간 800km에만 머물지 않는다.  

  길은 사람들의 내적 지향만큼 점점 늘어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카미노 데 산티아고)이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에 의해 성지로 선언된 이래, 순례길은 곳곳에서 추가되었다. 프랑스 피레네산맥을 넘는 순례길의 반대편으로 포르투갈의 대서양 해안을 따라 걷는 해변길도 있다. 영성을 위한 순례길인 만큼 포르투갈의 유명한 성지 파티마를 거쳐 가는 코스도 만들어졌다. 파티마로 향하는 길은 카미노의 노란 화살표처럼 파란 화살표로 표시된다.

  이번에 찾은 스페인-포르투갈 영성순례 일정은 다만 콤포스텔라 오브라도이 광장을 밟고 지나가는데 그쳐 아쉬움이 컸다. 그럼에도 40일 밤낮 외로운 순례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마지막 산티아고 성벽의 아치를 통과하면서 광장 한복판에 이르렀을 순간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작은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순례자들은 감격을 품은 채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인 피니스테라(땅끝)까지 그 걸음을 연장하였다. 우리는 버스로 이동하였다.  

  ‘더 웨이’(The Way)는 산티아고를 주제로 한 영화이다. 영화는 길 위에서 고유한 기억을 새기는 순례자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걷는 이유를 설명한다. 주인공 톰이 산티아고를 걷는 배경은 남다르다. 그다지 살갑게 지내지 못하던 아들 다니엘이 순례길의 시작인 피레네산맥에서 조난당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현지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고서다. 아버지는 시신을 미국으로 가져오려다 생각을 바꾸었다. 아들이 남긴 장비로 채비를 갖춘 톰은 화장한 아들의 유골함을 들고 순례길로 나섰다. 

  아버지는 순례길을 걸으면서 의미있는 장소마다 아들의 유해를 조금씩 뿌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유해를 뿌린 곳은 콤포스텔라에서 70km를 더 가는 바닷가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대신해서 걸었지만, 길을 걸으면서 점점 자신만의 순례를 이어간다. 순례길에 우연히 어울린 네 명의 동행자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걷지만, 때론 같이 때론 따로 자신의 길로 나아간다. 영화는 톰이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걸음은 모로코의 어느 도시에서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유럽 사람들은 자기 집 앞에서 출발하는 수만 가지의 순례길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마다 자신의 고유한 순례길을 품고 있는 셈이다. 지지난 여름 중부 독일 복흠시의 좁은 골목길에서 발견한 뜬금없는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가리비 이정표는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유명 작가의 이름 말고도 다른 이름의 순례기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배경이다. 그중에는 어느 대학생이 쓴 <카미노, 인생이 글러먹은 이들에게>(현건우)도 있다.

  순례자의 라틴어 어원 페레그리니(peregrini)는 ‘낯선 사람’을 의미한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낯선 경계로 여행하며, 예기치 못한 위험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겹겹이 포장된 자기의 비밀한 내면과 마주하는 일은 두려움이다. 게다가 삿된 자신이 성스러움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기까지 하다. 순례를 거스름으로 나아가는 길로 여기는 까닭이다. 한나절을 걷더라도 길을 간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모든 영성순례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물론 그 행로가 어디어디 성지순례를 다녀오거나, 무슨무슨 영성순례를 나들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수난의 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꼬드기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럭저럭 휩쓸려 살아온 삶들을 향해 비로소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신다. 이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존엄성과 인간다움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주님과 동행함으로 삶을 바로 세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