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의 방>, 정애성, 명작, 2023)

  2024년 여름은 모질게도 더웠습니다. 그 여름의 끝자락에 강화에서 정명성목사를 만났습니다. 모임이 끝나면서 트렁크에서 책을 한 권 전해줍니다. 마지막 남은 한 권이라며, 건네는 손끝에 정애성목사의 유고집이랍니다. 그의 누이 정애성목사는 잘 알지 못합니다. 허나 가끔 학교에서 그분을 만나면, 동생을 염려하는 말마디만 몇 개씩 전해 주곤 했습니다. 『소피아의 방』을 읽으며, 그를 알아갑니다. 아니 인생이 일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약한 몸으로 살아온 인생, 마디마다 하나님의 은총이 실린 일생을 아우 정명성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는 것은/ 온 힘을 다해 살았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 무엇이 되어/ 얼마의 시간 동안 어떻게 피었었건/ 당신은 다하여 산 것이고/ 남김없이 다했기 때문에 지는 것이다”//(9)

  1997년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버스로 대륙 여행을 계획합니다. 뉴욕을 출발하여 보스턴을 거쳐 앨라배마 마을을 지나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LA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는 계획입니다. 어렵고 험준한 여행길에서 만난 두 천사를 소개합니다. 여행 후반부에 샌프란시스코를 향합니다. 그 도시에 사는 권희순목사님을 만납니다. 목사님은 첫눈에 “사람의 얼굴이 아니네. 우리 집에서 쉬고 인간의 얼굴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여차 저차 당신이 수업을 마치고 올 때까지 즐기라며, 미리 예약한 샌프란시스코 버스 투어 티켓을 주십니다. 홀로 여행하던 중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종일토록 헤매다가 백인도, 흑인도, 히스패닉도 아닌 한 사람, 키 작고 약간 야윈 한 우체부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는 길 잃은 이방인에게 아직 남은 편지들을 전한 후, 이 자리에 올 테니 꼼짝 말고 앉아있으라고 합니다.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그가 다시 나타났고, 무사히 권목사님댁까지 안내해 준 그는 인디언의 후예였습니다.(43)  

  소피아의 방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합니다. 여고 1학년 첫 시간에 홍표 선생님을 만납니다. 그 담임선생님은 5년 동안 남자고등학교에서 빡세게 영어를 가르쳐오다가 처음으로 여고로 옮겨온 터입니다. ROTC출신에 영락없이 남학교 체질입니다. 선생님은 생물학적, 정서적으로 매우 생소한 여학생들을 접하고는 얼굴을 붉힌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그런 그분과의 면담시간, “우리 반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녀석이 너야 너, 정애성.” 선생님의 말뜻을 몰라 멀뚱히 쳐다보는데 공격이 계속됩니다. “문과 5학급 학생들 중에서 왜 네 머리가 제일 좋은지 정말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중학교 성적이 썩 좋지도 않았고, 몸은 허약하고 별로 꿈도 없어 보이는 네가 말이야. 바깥의 저 아이들 중에 꿈도 있고 열심 있고 건강한 얘들이 많은데, 왜 저 아이들보다 네 머리가 좋아야 하지? 네 어머니가 교회 목사니 너도 아마 기독교인 일텐데, 제발 내게 좀 알려다우. 네 아이큐 검사 결과가 잘못된 건지, 아니면 네가 뭘 숨겨온 건지 정말 궁금하단 말이야.”(67) 고개를 파묻고 눈물 콧물로 뻘겋게 얼룩진 얼굴을 쳐다보며 손수건을 건네주던 선생님은 고 정애성목사를 모두 그려주는 한 폭의 채색화입니다. 

  여섯 살에 천국으로 보내드린 아버지 목사님, 아버지의 부재(不在)로도 연년생이던 동생 정명성목사와 자신을 목사로 키워 오신 어머니 이양운목사님, 온 가족 하나님 사랑으로 얼룩진 영성을 보여줍니다. 동생 정명성은 “그늘”이라 노래합니다. 

  나뭇가지에 붙어/ 목 놓아 우짖는 매미는/ 나무보다 더 큰 그늘이 되고/ 밀짚모자에 수건을 내리쓰고/ 작열하는 밭에서/ 끝물 옥수수를 거두는 촌노는/ 들판을 넉넉히 덮는 그늘이 된다.(97)       

한천교회 전승영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