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늬 고양이 비누> 소호랑 저, 킨더랜드, 2021)

어느 날, 조카 아이가 같이 보고 싶다며 동화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책이 재밌을 것 같아 골랐다고 했지만, 나는 조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를 알고 있다. 핑크색이었고, ‘꽃무늬’와 ‘고양이’란 단어가 같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아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삼촌이 조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행은 동화책 한 권을 맛깔나게 읽어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책을 덮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는 ‘삼촌 왜 그래!’ 낯선 내 모습에 당황해했다. 나는 ‘눈에 뭔가가 들어갔다’는 누구도 믿지 않을 상투적인 핑계를 둘러대다가 내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다. 동화책은 본디 어른을 위한 것이다. 아이에게는 재미있고, 어른에게는 감동적이다. 이 책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다.

1) 꽃무늬 고양이 비누는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행복해한다. 모두가 이 새 비누로 손을 씻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비누는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모양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가 뭉뚝해졌고, 꽃무늬가 희미해지더니, 형체를 잃어버렸다. 사람들의 사랑은 계속되었고, 뾰쪽한 귀는 둥근 귀가 되었다가 다 사라져버렸다. 결국, 꽃무늬 고양이 비누는 작은 조각이 되어 다른 비누와 합쳐지게 된다. 
2) 이때, 코알라 비누가 등장한다. 꽃무늬 고양이 비누는 코알라 비누와 친해지기 위해 말을 건다. 콧대 높은 코알라 비누는 조각 비누의 목소리를 무시한다. 고양이 비누는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를 슬퍼한다. 더는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끌지 못함을 깨닫고 크게 절망하여 운다. 한참을 울었을까? 고양이 비누는 그곳에서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그러나 이제는 뭉뚝해진 여러 비누들과 함께 망 속에 던져진다. 머지않아 콧대 높던 코알라 비누도 그곳에서 하나가 된다. 
3) 고양이 비누도, 코알라 비누도, 또 다른 많은 비누들도 이제는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자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비누의 역할과 쓰임은 새로워졌다. 조각난 비누들은 하나로 뭉쳐져 무지개색을 내는 비누가 되었고, 이들은 함께 사용되고 있다. 비록, 과거와 같은 모습은 아닐지라도!

쓰면 쓸수록 작아지는 비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작은 조각을 뭉쳐서 사용하고 버린다. 그런데 비누의 입장에서 이것은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져가는 씁쓸한 물러남이자, 소멸의 과정이다. 비누만 그럴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랑받는가? 외모 때문일까? 능력 때문일까? 이용가치 때문일까? 가진 것 때문일까? 그것이 사라져버리면 무가치한 존재로 바뀌고 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라고 말하는 순간, 존재 자체의 빛은 사라지고 만다. 

이 부분에서 떠오르는 말씀 속 장면이 있다. 부활의 주님은 십자가의 길에서 당신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가신다. 새로 지어주신 근사한 이름(게바) 대신에, 원래 이름 ‘시몬’을 부르신다. 그리곤 ‘사랑’을 물으신다(요 21:15). 그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보기 좋게 실패한 쓰라린 기억 때문이었다. 집요하게 물으시는 예수님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문득, 이것은 시몬을 향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고백’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위해 그에게 찾아가신 것 아닐까?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려 감히 주 앞에 설 수 없는 실패한 제자에게 예수님은 집요하게 사랑을 요구하셨고, 끝내 시몬의 자백을 받아내신다.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지 주를 사랑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능히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상처의 자리에 사명이 부어지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능력으로 평가받던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큰 상실감을 느낀다. 스스로 존재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가치해질까봐 발버둥을 치며 산다. 이때 우리를 다시 세우는 것은 어떤 조건도 개의치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품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어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은혜의 사건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존재 그 자체로 서는 법을 배운다. 내 상태와 상관없이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아니 그 사랑을 위해 천하(天下)를 버리시는, 감당할 수 없는 창조주의 사랑 앞에 서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창조주의 ‘사랑의 낭비’를 ‘자신의 구원’으로 고백하는 공동체가 된다. 그 누구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랑할 수 없다. 내 존재의 가치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만 입증되기 때문에! 신앙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주님만을 기대한다. 이때 교회는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사명을 만나게 된다. 가장 작은 자를 통해서 큰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의미 아닐까?

소멸해가는 비누가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존재로 서는 법을! 자존감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교회론과 신앙공동체에 대한 의미를! 타인과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을!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5분이면 읽을 수 있고, 연기하며 아이에게 읽어줘도 10분이면 끝나는 그림책.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묵상이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마음을 나누고 싶은 이와 함께 읽고 서로의 모습을 이야기해봐도 좋겠다. 나는 어떤 존재인지, 서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공동체는 어떻게 세워져 가는지에 대한 묵직한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포 꿈의교회 신동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