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한창이었던 이번 주 어느 날 아침, 모처럼 아내와 함께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함께 지하철을 타면 한 이십 분 정도를 함께 이동하다가 제가 먼저 내리는데 생동감이 넘치는 아침 출근길이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생기 어린 이야기를 솔찬히 나눕니다.
그날 아침에도 비가 내려 각자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역에 도착해서 우산을 접을 때 아내의 우산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대충 쓰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접을 수도 없을 정도로 우산살의 여러 부위가 녹슬고 꺾여서 역사 내 쓰레기통에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먼저 내리기 전, 제 우산을 아내에게 건네었습니다. 교회에 가는 길이 우산 없어도 별로 비 맞을 일 없다고 에둘러 말했습니다. 사실 지하철을 탈 때에는 그다지 비가 많이 오지 않기도 해서 그런 객기를 부릴만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역사 밖으로 나오자 난감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가늘었던 빗줄기가 어느새 폭우가 되어 내리고 있었고 주변에 우산을 살 만한 곳도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교회까지 오는 동안 비를 쫄딱 맞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교회에 도착해서 물기를 닦고 있는데 실실 제가 웃고 있는 것 아닙니까? 평소 은근히 짜증도 잘 내고, 웃음도 별로 없는 제가 말입니다! 만일 제가 혼자 집에서 나와서 우산이 망가지고 이런 일을 겪었더라면 신경질적으로 물을 털어 내며 재수 없는 날이라느니 하면서 하루를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즈음 아내는 저의 희생 덕에 안전하게 출근했겠지요. 그렇게 그날 아침 저는 우스꽝스런 몰골로 기쁨 가운데 웃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기쁨'입니다.
그날의 일은 제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우리가 어떤 일을 겪느냐가 아니라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도 사랑 때문에 주어진 일이라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몸소 깨달았습니다.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의 인생, 나의 삶, 아니 나 자신을 사랑하면 모든 순간이 기쁨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평소에 내 안에 짜증이나 화가 많다면 짜증이나 화를 유발하는 이런저런 사건이나 상황 혹은 사람 때문이 아니라 마음 깊은 숨겨진 곳에서 나의 삶,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지요.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는 오스트라아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로서 매우 사랑스러운 바이올린 소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중에서 ‘사랑의 기쁨(Liebesfreud)’과 ‘사랑의 슬픔(Liebesleid)’ 연작은 많은 사랑을 받으며 바이올린 독주회의 앵콜 곡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그날 아침 사건의 배경 음악이 바로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는 비록 비에 흠뻑 젖어버렸지만 모든 일들은 사랑 안에서 기쁨이 되었습니다.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은 아마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밀하고 정겨운 클래식 음악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 국민에게 오랫동안 큰 웃음을 주었던 개그 프로그램의 오프닝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날 아침의 상황, 저의 표정, 비에 쫄딱 젖은 저의 몰골도 어느 개그 프로그램 못지않게 우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몸 바쳐 사랑의 기쁨을 깨닫게 되고 이렇게 나눌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할 뿐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우리 모두 그 개그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때로는 그 어설픔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을지라도) ‘사랑의 달인’이 되어가면 참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