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로봇 드림》 (Robot Dreams, 2023)

사라 바론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 《로봇 드림》은 대사가 단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주인공을 포함하여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모두 동물들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인간과 언어의 부재를 통하여 국가와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뛰어넘고 보편적인 감정에 호소한다. 이때 전달되는 감정들은 이별과 상실, 사랑과 회환 등에 관계된 것들이다.

주인공 개는 평소처럼 외롭고 지루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다. 냉동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며 켠 TV에서는 의미 없는 프로그램들만 스쳐가고 창문 넘어 다정한 한 쌍의 모습은 외로움만 증폭시킨다. 바로 그 순간, 개는 TV 속에서 로봇 판매 광고를 운명처럼 만난다. 영화 속의 로봇은 일종의 반려동물과도 같은 존재다. 배달되어 온 로봇을 정성스럽게 조립한 개는 마침내 깨어난 로봇과 우정과 사랑을 쌓아나간다. 서로를 배우며 기쁨과 사랑 속에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개와 로봇, 하지만 세상사가 늘 그렇듯 이처럼 완벽해 보이는 관계의 행복 속으로 불행의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한다.

유원지를 겸한 해변에 놀러간 개와 로봇은 물놀이를 즐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잘 놀다 한 숨 자고 일어난 개는 물 때문에 녹이 슬었는지 아니면 고장이 났는지 일어나지 못하는 로봇을 보고 놀란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로봇을 나를 수 없어 개는 할 수 없이 로봇을 해변에 두고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수리도구를 챙기고는 다시 로봇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런데 그 사이 유원지 해변은 문이 닫히고 설상가상으로 때마침 여름 시즌을 마친 유원지는 내년 시즌 재개장 때까지 폐쇄되고 만다. 폐장된 해변으로 접근하려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개는 도리 없이 내년 여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랑이 최고조였을 때 갑작스레 찾아온 긴 이별 속에서 개와 로봇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각자 외로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과연 이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원작 그래픽 노블을 그린 사라 바론에게는 함께 살던 반려견을 떠나보낸 경험이 작품의 배경으로 있었다고 한다. 영화를 만든 스페인 감독 파블로 베르헤르는 이 책을 어린 딸에게 주려고 샀다가 자신이 먼저 읽고 울었다고 한다.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한 감독은 친구를 잃은 경험을 떠올렸다고도 하는데, 과연 그는 원작에 담긴 이별과 상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힘으로서의 기억을 자신의 영화 속에 잘 그려내고 있다.

원작과 달리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도시인 뉴욕 역시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모두에게 익숙한 뉴욕의 여러 풍광들 중 특별히 영화 속에서 눈길을 끄는 건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9.11 테러로 무너진 쌍둥이 빌딩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과거를 그린 영화 속에 두 빌딩이 보일 때마다 상실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아름다운 마천루가 그리는 아름다운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젖어들게도 한다. 이것이 기억이 가진 힘일까?

영화의 제목처럼 이별의 시간 동안 로봇은 꿈을 꾼다. 기억에 기댄 꿈은 달콤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달콤함이 더한 꿈일수록 다시금 현실에 부딪히는 순간 더 큰 씁쓸함으로 변하기도 한다. 헤어지고 상실된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내 마음 한 구석에 영원히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순간 예기치 않은 기억으로 소환된다. 하지만 이렇게 소환된 기억은 아픔과 고통만을 선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감싸진 아픔, 어쩌면 그것이 회환의 정체일지도 모른다. 깊은 회환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의 메인 테마송인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의 <September>가 다시 한 번 강렬하게 흐른다. 사랑을 추억하는 내용의 가사로 이미 많은 영화에도 등장했던 이 올드팝은 《로봇 드림》을 통해 다시 한 번 소환되고 다시 한 번 각인된다. “Do you remember?”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의 힘은 이렇게나 크고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