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언어의 아픔을 끌어안는 대통령의 통역사

홍설영 교수

“국운의 무게를 지고 십자가를 깨달았죠”

한국과 미국의 역대 대통령부터 현 윤석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수반과 그들의 정상회담에서 영어 통역을 담당한 홍설영 박사. 그녀는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인 국제회의통역사이다. 이렇듯 선망의 대상인 최고위급 인사의 통역사를 지낸 그녀의 삶은 어떨지 몹시 궁금했다. 인터뷰 결과 화려한 외양만큼의 고충과 아픔이 드러났는데, 통역사의 삶 그리고 직업을 통해 얻은 신앙적인 깨달음과 사명을 들어보았다.

글. 최윤희 │ 사진. 김수안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일하는 통역사의 모습을 언론에서 볼 때면 경이로웠다. 영어를 얼마나 잘하면 대통령의 입이 될 수 있을까? 오천만 인구 중 극소수만이 설 수 있는 자리 아닐까? 이면의 고충이 크리란 생각이 막연히 스치긴 했으나, 여전히 기자의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떻게 이 길을 걷게 됐을까?

통역사를 꿈꾸다

“어려서부터 언어를 좋아했고, 이런 적성을 일찌감치 알아챈 것 같아요. 초등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5학년부터 한국에서 학교를 다시 다녔으니 감사하게도 영어를 저절로 습득하는 언어적령기에 영어권에 있었던 거죠. 한국으로 돌아와서 보니 당시만 해도 조기 영어교육 붐이 없어서, 영어가 나만의 특징임을 깨달으면서, 외교관이나 통역사를 막연히 꿈꾸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는 자연스레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그녀가 대학을 다닌 당시는 영어를 잘하면 취업도 잘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조직 생활보다는 혼자 업무를 책임지는 전문직을 원했다고 한다.

“대학 시절 신문에서 전국대학생 선호직업 1위로 동시통역사가 나오고, 고소득이라는 언론 보도도 많았어요. 이 직업이 너무 전도유망해 보여서 망설임 없이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입학을 준비했죠. 입시 전문학원을 다녀야 했는데, 여러 이유로 남이 저를 긴장시키는 상황을 유난히 싫어했어요. 돌이켜보면 학원에서부터 긴장을 다스리고 집중하는 훈련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열심히 준비해서 대학원에 합격했어요.”

‘타인’이라는 통역의 본질

대화를 해보니 통역은 그저 영어만 잘하면 되는 범주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다.

“원래 저는 언어 그 자체를 사랑하고 감성이 풍부했어요. 언어의 묘미를 즐겼죠. 그런데 통역의 세계로 진입하자마자 언어적인 서정을 느낄 여유가 통째로 사라졌어요. 통역은 100퍼센트 남의 말인데, ‘타인’이라는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직업에 대해 단순 해석을 한 거죠. 저는 언어적인 표현 욕구가 강한데, 직업에서는 제 생각이 드러날 여지는 아예 없다는 걸 대학원에 가서야 깨달은 거예요. 타인의 언어인데 내용이 너무 어렵고, 이해해야 하는 깊이가 그전까지 했던 언어생활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심층 의미, 깊은 논리까지 완벽히 이해해야 하고, 어떤 말이든 알아들으려면 습득할 지식은 방대하고, 즉시 다른 언어로 옮겨야 한다는 시간 압박은 엄청나고...통역이 배에서 한 손으로 물구나무를 서면서 다른 손으로는 노를 저어 전진하는 기예로 느껴졌어요.”

일의 긴박감이 느껴져 들으면서 숨이 찼다. 동시에 조금씩 직업의 실체에 다가서는 기분이었다.

뇌의 아우성

“국제회의통역사가 담당하는 통역의 유형이 크게 순차통역, 동시통역, 문장구역으로 나뉘어요. 순차통역은 기억력과 함께 ‘노트테이킹’이라는 특수 기록기법을 동원해서 말이 끝나는 즉시 통역하는 거예요. 어떤 내용도 놓치면 안 돼서 말을 들으면서 초집중해서 기록하고 기억에서 재생해요. 동시통역은 말하는 동시에 통역을 하는 건데, 다 듣고 정리해서 말할 여유가 없어서 순차통역과는 또 다른 원리로 뇌에서 언어를 인지하고 처리해야 돼요. 문장구역은 글을 보는 즉시 입으로 통역하는 거예요. 이때는 활자 때문에 언어간섭이 심해서 또 다른 극복 노력이 필요해요. 통역 종류별로 통역사의 뇌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움직여요. 통역을 잘 모를 때는 그저 언어이고 소통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통역을 언어로 푸는 암호나 수학 공식으로 여겨요.”

얘기만 들어도 얼마나 긴장 상태에서 일하는지 느껴졌다.

“사실 통역은 인간의 뇌가 받아들이기에 부자연스러운 행위여서 뇌에 과부하가 커요. 제가 올해로 통역사 24년 차이지만, 연차만큼 무진장 편해진다는 느낌은 없어요. 매번 방대한 자료를 공부하고 현장에서는 고도로 집중하죠. 통역은 스크립트 없이 할 때가 훨씬 많아서 아무리 숙련됐어도 잠시 후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채 몇 초 내로, 혹은 동시통역 일의 경우 동시다발적으로 그걸 다른 언어로 완벽히 따라가면서 표현해줘야 해요. 변수가 많은 예측불허의 환경에서 완벽한 퍼포먼스를 내야 하니 오랜 세월 혹사당한 제 뇌가 ‘주인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아우성친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뇌한테 자주 사과한답니다.”

정상회담, 국운을 결정하는 언어의 무게

대통령들과의 통역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물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저를 엄격한 환경에서 연단하셨어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주한미국대사관 전속 통역사로 취업을 해서 미국 대사님의 통역을 맡았죠. 미국 대사는 한국에 있는 최고위급 미국 외교관이라서 그분이 만나고 소통하는 상대측도 모두 최고위급이에요. 그래서 어린 나이에 대사님의 소통을 돕고 정치, 외교, 국방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한미 간의 공식 회담의 통역을 했어요. 통역사 1~2년 차부터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접했어요.”

실제로 그녀는 ‘2023년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에서 대통령의 전 일정의 동시통역을 맡았다. ‘바이든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과 연이은 ‘공동기자회견’, ‘하버드대학교 정책연설’ 등 대통령의 모든 말을 호흡으로 함께 했다.

“대통령의 통역을 한다는 게 힘들죠. 특히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는 정상회담에서는 조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했어요. 제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에 마가복음 7장 34절 ‘에바다’의 축복을 간구했죠. 주님의 기름 부으심이 없었다면 입을 떼지 못했을 거예요. 성령님께서 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풀어내도록 함께하셨어요. 하나님이 영감을 주시지 않으면 필요한 표현을 1~2초 만에 즉시 정확히 떠올리기 힘들어요. 제가 했다기보다는 제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 때마다 통역을 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기억에 남는 사람

오랜 통역사 생활을 하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일까?

“첫 직장의 상관이셨던 토마스 허바드 미국 대사님이 제일 기억나요. 제가 사회초년생으로 긴장되는 상황에서 어려운 통역을 즉시 해내야 했을 때 너그럽게 용납해 주고 보듬어주셨어요. 이런 분들을 보면서 리더의 언어와 생각도 배웠지만, 리더는 지식이 아닌 인품으로 세워진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만난 훌륭한 리더들은 인격과 덕망을 갖춘 분들이었고, 두뇌가 명석한 분들은 오히려 리더를 보좌하고 있더라고요. 거기에서 하늘의 법칙이 읽혔기 때문에 학벌, 지위를 쫓으라는 사단의 계략에 속지 않았어요.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진다고 예수님도 이미 알려주셨잖아요.”

에피소드

워낙 많은 통역을 한지라 에피소드도 많았을 텐데 어떤 것이 있을까?

“통역을 한 세월이 20년이 넘었으니, 에피소드는 수도 없이 많죠. 대통령의 해외 일정을 수행하면 한 몸이 되어 첩보영화처럼 긴박하게 움직여요. 제 첫 정상회담 경험이 노무현 대통령을 수행한 ‘아시아유럽(ASEM) 정상회담’이었는데 각국 국가수반들이 한 회의장에 모여 여러 개의 언어와 릴레이로 동시통역을 하는 진귀한 경험을 했죠. 조지 부시 대통령을 통역할 때는 텍사스 억양이 강해서 고전했고요. 세계대학 총장단을 모시고 북한도 가봤어요. 할리우드 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전 일정을 수행하면서 백화점 신발 쇼핑까지 돕고. 세계 최대 군기지인 하와이 태평양사령부로 출장 가서 항공모함도 탔고. 셀 수 없이 많은 기억이 쌓여 있어요.”

직업병

직업병은 소음, 그중에서도 말소리를 안 좋아한다고 한다.

“일할 때 말소리를 과하게 들으니 고요 속에서 진정 휴식할 수 있어요. 근데 제가 못 알아듣는 외국어를 들으면 또 스트레스가 풀려요. 알아듣는 순간 뇌가 자꾸 통역 기계처럼 작동해서 저는 알아듣는 게 괴롭거든요. 그래서 못 알아들으면 역으로 희열을 느껴요. 그래서 해외 출장 가면 호텔 방에서 모르는 외국어 채널 티브이를 크게 틀어놓고 있어요. 직업병 중 또 하나는, 중언부언 길게 말하는 사람에 대한 인내가 부족해요. 요점 없이 과정을 장황하게 풀면서 누가 말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요. 말의 핵심을 파악하고 정리하는 게 제 업이라서요.”

타인의 삶

타인의 언어를 대신해 주며 산다는 건 무엇일까? 통역사로서 얻은 철학을 물었다.

“통역을 하다 보면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타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돼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통역의 현장에서 세상을 배우고 각계각층의 삶과 희로애락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어요. 영적으로는 숙성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주님의 긍휼을 깨닫게 됐어요. 사단은 1차원적인 이분법으로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분류하고 존재들을 계층화하며 서로 적대시하고 시기하도록 부추기죠.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는 역할의 차이이고 인생의 사명이잖아요. 인생은 어느 정도 공평하다고 느껴요.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림자 같은 삶의 암흑기에는 빛 되신 주님이 더 밝히 보이잖아요.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제 눈으로 확인했어요.”

정체성

통역사로 활동하면서 정체성에 대한 생각도 완전 달라졌는데...

“정체성이라고 하면 주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있고, 세상이 말하는 정체성이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은 특히 직업 정체성을 자아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문화가 강한 것 같아요. 여기에서 사단이 활개치고 분란이 일어나죠. 사단은 사람들 간의 우열을 나누기를 좋아하는데 사단 자신이 열등감에 젖은 찌질이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세상이 좋다고 하는 직업을 따라간 셈이죠. 하지만 직업인으로서 고난과 연단이 그치지 않았어요. 통역할 때는 제가 긴장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 정도로 집중하기 때문에요. 일을 하고 나면 온몸의 근육이 굳어요. 건강이 극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한 건, 육아를 하는 동시에 논문을 쓰면서 일도 쉬지 않으면서예요. 출산 후 몸조리를 못하면서 섬유근통이라는 병도 심각하게 앓았어요. 자가면역질환인데 전신으로 통증이 와요.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면서 컨트롤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었고, 갈 때마다 온몸에 주사를 수십 대씩 맞았어요. 마음과 몸의 고통, 극강의 스트레스를 다 경험했어요. 그러다 제 몸을 향해 말씀 선포로 축사 기도를 하면서 주의 자녀가 가진 영적인 권세를 주님께서 알려주셨고, 그렇게 극복하고 물리쳤어요. 그러면서 하늘의 정체성을 저의 확고한 진짜 정체성으로 인지하게 됐어요. 멋모를 때는 직업으로 제 정체성과 자존감을 떠받들려 했죠. 이제 저에게 직업은 역할이고 사명일 뿐, 직업이 제가 아니에요.”

‘상처’에 관하여

그녀가 어릴 때 부모님이 많이 다투었다.

“그래서 제가 말에 굉장히 민감해요. 긴장 속에서 유년 시절을 많이 보냈고, 말의 상처를 가슴에 늘 품고 있었어요. ‘언어’와 ‘긴장’의 조합이 저를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이었는데, 이 아이러니가 직업 세계에서 다시 펼쳐진 거죠. 어릴 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긴장’ 속으로 들어가 제가 ‘원치 않는 언어’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제 인생에서 그치지 않는 언어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항의도 했어요. 왜 저는 한평생 이토록 무거운 언어의 무게를 짊어지며 살아야 하는지를. 통역사의 길을 걷고부터는 언어가 본격적으로 저를 치는 채찍으로 돌변해서 애증 관계가 시작됐죠. 제가 대통령과 정상급 통역을 많이 하다 보니 어쩌면 긴장과 중압감이 누구보다 커서 언어 안에서 더 아팠던 것 같아요. 내가 아닌 타인은 참 어려운 존재예요. 저는 애초에 언어에 민감해져 있으니 아픔이 더 큰 거죠. 언어와 갈등의 아픔을 남들보다 더 아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저를 언어의 영역으로 더 깊숙이 보내셔서 그 안에서 제가 중재하고 언어를 극복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회복을 돕도록 하셨어요. 아픔을 끌어안고 돌파하는 것이 주님에게는 치유의 길이었어요.”

상처의 치유

그녀는 상처를 하나님 안에서 치유했다.

“개인적으로 ‘상처’라는 단어가 난무하는 것 같아요. 특히 교회 문화에서요. 실제로 사람들은 늘 상처를 받고 있죠. 오늘 제가 기독교 잡지 ‘치유’의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저도 제 아픔을 얘기하는 중이고요. 하지만 상처를 받았다고 표현하면 자기연민이나 피해의식이 생기잖아요. 상처를 계속 묵상하게 되고요. 제가 언어를 바꾸는 게 직업이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어느 날 묵상 중에 알려주셨어요. ‘‘상처’를 받은 게 아니라 ‘공격’을 받은 거다. 네가 이미 이긴 싸움에서 너를 절대 못 이길 사단이 너를 ‘헛되이’ 공격했다. 상처도 공격도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요.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의 상처가 점차 씻겨지고 영적으로 자신감을 얻었어요. 공격을 받아도 상처로 남길지는 내 선택이라고 여기게 됐어요. 이제는 영적인 공격이 오면 내가 잘하고 있다는 사인으로 읽혀지기까지 해요. 그래서 이제는 ‘상처가 있다 없다’, ‘상처를 받았다’ 이런 언어는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몸도 멘탈도 유약하고 내면도 여리여리한 사람이었는데, 주님은 연단을 통과하면서 강한 영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신 것 같아요. 저는 정신과 건강의 무너짐을 많이 겪었는데, 특히 불면증, 건강 염려증에 빠질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왼쪽 엄지손가락에 JESUS라고 가상의 타투가 새겨져 있다고 생각하면서 손가락을 내려다봐요. 마음속으로 ‘예수, 예수, 예수’ 세 번만 외치면 그 이름의 권세와 크기에 압도되어서 두려움도 제압되죠. 생각해 보면 두려움도 교만이더라고요. 뭐를 할 수 있고 없는 존재를 내 자신으로 전면에 내세우니까 두려움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어찌 보면 저도 상처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지만 그 보상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크심을 깨달아서, 지나온 모든 시간에 대해 감사함만이 남아 있어요.”

언어와 존재의 아픔을 끌어안는 통역사

그녀는 통역을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는 일로 표현했다. 통역이 아픔이라고?... 그 아픔이란 무엇일까?

“언어가 다르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다름이에요. 언어는 사상, 정서, 문화 등 모든 걸 담고 있잖아요. 한국 사람들끼리 한국어로 대화를 해도 말이 안 통해서 갈등이 생기는 일이 다반사잖아요. 소통을 이룬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타협과 양보, 배려와 희생 없이는 가능하지 않아요. 그러니 언어가 서로 다른 이들의 소통을 돕는다는 건 그 ‘다름’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오해의 씨앗을 없애고자 통역사가 중간에서 ‘아픔’을 대신 끌어안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직업이 일종의 살신성인이라고 생각해요. 다름에서 오는 아픔을 내가 대신 해소해 주고 나를 내려놓고 기꺼이 남이 되어주어야 하거든요. 또 복잡한 두 언어를 순간적으로 집중해서 깊은 의미를 캐치하려면 통역사의 뇌는 고뇌해야 돼요. 언어가 다르다는 건 사고, 논리, 어순도 다르고, 단어에 담긴 개념도 의미의 범위도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소통의 길을 터주는 건 이토록 무겁고 아픈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일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알게 되니 감사하죠.”

아픔 없는 번역은 아픔을 회피한 것?

그녀는 직업병인데,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잘 못 읽는다고 한다.

“번역투가 많이 보여서예요. 제 기준으로는 언어가 처리되다 만 것 같고, 결국 번역한 사람이 아픔을 회피한 걸로 보이거든요. 어떤 문장들은 한국어인데도 읽다 보면 어떤 영어 문장에서 비롯되었는지가 떠올라요. 이런 글을 보면 울렁증이 올라와요. 번역사가 아픔을 감수하지 않고 독자에게 전가한 상황인 거죠. 20년째 대학원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다들 대학원 생활을 많이 힘들어해요. 저도 겪은 시간이니까 너무 이해하죠.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언어의 아픔을 잘 끌어안도록 저는 먼저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아픔을 보듬어줘야 해요. 동시에 타인의 아픔을 끌어안는 방법에 있어서는 엄격히 훈련하죠. 통역사의 뇌가 편하고 게으르면 소통이 안 되거든요. 말하고 보니 참 복잡미묘하네요.”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저 연약한 몸으로 영혼육의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녀가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전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제 인생의 화두가 언어잖아요. 제가 아픔을 딛고 직업으로 사명을 긴 세월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언어가 가진 창조의 힘에 의지해서였어요. 제 스스로가 저한테 좋은 언어를 많이 심어주어야 했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 그걸 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나약한 인간인데 무슨 수로 자신한테 좋은 말을 심어주겠어요? 상처와 스트레스가 겹겹이 쌓여있는데 말이죠.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그걸 말씀이 해주었어요. 성경을 읽으면 오묘한 섭리와 아버지의 해결책이 보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과 하늘의 언어로 제 자신을 덮어쓰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상황에 눌릴 때는 ‘도와주세요‘보다는 ‘이미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선포로 바꾸었어요. 아플 때는 ‘채찍에 맞음으로 병을 주님이 짊어지셨고 저는 이미 나음을 얻었습니다’라고요. 어둠을 향해 영으로 선제공격을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미 받은 것을 달라고 조르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말씀에서 약속한 모든 것은 자녀의 소유잖아요. 쟁취의 도구가 우리의 말, 언어이죠. 하나님의 자녀는 언어의 유전을 받았으니까요. 신약을 보면, 예수님이 쓰시는 언어가 굉장히 성숙하고 사랑이 가득하면서도 또 예리하고 위력이 있잖아요. 예수님이 이미 언어의 본보기를 보여주셨는데 인간들이 못나서 말을 폭력의 도구로 쓸 뿐이죠. 나의 언어를 하나님의 언어로 바꾸면 인생도 운명도 달라지고, 하나님께 받는 언어 DNA로 천국의 언어를 쓰기 시작하면 되는 거라고 저는 확실히 믿어요. 언어는 그저 말이 아니라 천지를 만든 창조의 힘이니까요.”

주님 안에서만 행복하다

“제가 대통령 통역을 자주 하니까 저한테 그런 수식어가 많이 따라다니고 오늘도 어쩌면 그래서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존재는 직업과는 비교가 안 되게 크고 깊죠.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두 손으로 직접 빚으신 아름다운 피조물, 아버지의 창작품이잖아요. 미국 백악관, 청와대, 화려한 왕궁 다 가봤지만, 오직 주님 안에서만 행복합니다. 저에게는 왕궁이나 시궁창이나 똑같아요. 성령님을 모신 그곳만이 천국입니다.”

그녀와 인터뷰를 하면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생각났다. 사회 유명 인사들을 숱하게 만나면서 교만해질 법도 했지만,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겸손하게 섬기며 자신의 직업에 대한 투철한 소명 의식이 있었다.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한 직업인의 내면과 고충을 이해한 만큼 더 많은 이들의 아픔을 가까이에서 돌아보아야겠다.

https://blog.naver.com/yunhichoi1/223440108465

<이 기사는 계간 ‘치유’ 2주년기념 특별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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