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애프터썬》 (Aftersun, 2022)

나이를 먹다 보면 어느새 문득 어린 시절 보았던 부모의 나이를 추월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때 드는 생각은 대체로 이런 종류의 것이다. 아, 그때 내 부모는 이렇게나 어렸단 말인가? 이런 생각 속에는 나이 든 삶이 되어서야 알게 되는 슬픔과 고통의 무게가 깊이 배어있다. 내 부모가 고작 이 나이에 겪어왔을 슬픔과 고통이 비로소 체감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내가 그 슬픔과 고통을 몰랐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무런 경험도 없는 아이가 어른의 아픔과 고통을 알 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가 부모의 고통을 모르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거의 본능적으로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자신들이 통과하고 있는 고통을 보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는 알 턱이 없다. 인식의 경험도 얕고 부모는 자신의 고통을 자식에게 전가시키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니 부모의 슬픔과 아픔을 아이가 알 턱이 없다. 그러다가 겨우 부모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슷한 아픔과 슬픔을 겪을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아이는 비로소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아,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나를 곁에 두고 이런 슬픔을 겪고 있었던 것이구나.

《애프터썬》은 어른이 된 아이의 바로 이 깊은 회한을 담고 있는 영화다. 서른한 번째 생일을 맞아 마침내 저 옛날 아버지의 나이에 도달한 딸은 20년 전 아버지와 함께 튀르키예로 떠났던 마지막 여름 여행을 떠올린다. 그 여행 중에서 아버지 역시 현재의 나와 같은 나이의 생일을 맞이했었다. 호기심과 장난기로 가득 찬 열한 살 소녀는 친구 같은 젊은 아빠와 여름 휴양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 소녀는 미처 몰랐다. 자기와 즐겁게 놀아주던 정다운 아빠가 얼마나 큰 좌절과 고통을 겪고 있었는지, 우울과 불안 속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는지, 자기 앞에서 그 어둠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어렵게 노력하고 있었는지. 당시 장난스럽게 아빠의 캠코더로 찍었던 영상들을 보면서 딸은 그 시절을 기억해내려 애쓴다. 그녀는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고통을 추적한다. 하지만 아이의 기억은 파편일 뿐이다. 그리하여 어른이 된 아이는 자신이 미처 보지 못 한 것들을 상상하여 새로운 파편의 조각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겨우 짝을 맞춰가면서 당시 아버지의 모습을 불완전하게나마 재구성해나간다. 그렇게 조각나고 불완전한 기억들은 깊은 회한의 그림들로 채워진다. 하지만 알게 혹은 모르게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했던 이를 잃은 상실감은 결코 회복에 이를 수 없다. 이미 잃어버린 사랑하는 이를 결코 위로할 수 없다. 그렇게 영화는 거세게 마음을 흔든다.

영화의 제목 ‘애프터썬’(aftersun)은 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썬크림을 뜻하는 말이다. 햇볕에 타기 전에 미리 바르는 썬크림이 아니라 타고 난 이후에 바르는 썬크림이기에 애프터썬이라고 부른다. 영화 속에서 아빠는 자주 이 썬크림을 딸에게 발라준다. 이 썬크림 애프터썬은 그녀가 떠올리는 애달픈 기억 행위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일그러지고 안타까운 기억을 떠올리는 일, 돌이킬 수 없는 먹먹한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마치 태양에 상한 살갗에 뒤늦게 바르는 썬크림과도 같은 것이다. 빛나고 즐거운 태양 이후에 찾아온 쓰라림, 그리고 그 쓰라림 위에 덧대는 후회와 안타까움, 제목은 너무나도 영화에 적합하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데이비드 보위와 퀸이 함께 부른 팝의 걸작 ‘Under Pressure’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서부터 가사와 상관없이 멜로디만 즐겼던 이 유명한 노래가 이런 가사였던가를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으며, 그 가사가 영화 속에 제 옷처럼 자연스레 녹아드는 광경을 목격하는 놀라운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영화 감상에 주의가 필요한 사람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상실감으로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관람에 주의할 것. 영화는 생각보다 오래 당신을 잡아둘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