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하얀 눈이 소복히 쌓였다. 5센티 이상 쌓인 듯 하다. 이런 날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을 하고 나간다. 이곳에 내려와 첫 겨울을 맞으면서부터 눈이 오면 으레 내 집 앞 눈은 내가 쓴다는 의식이 철저히 각인되었다. 그래서 눈이 온 날이건 오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넉가래를 챙기고 대문 앞을 나서주는 것이 마을에 대한 예의다. 그리고 마을의 모든 집들이 길가 옆이고 길은 경사진 도로라 눈이 오면 즉시 쓸어 주어야 한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면 상관없는데 기온이 뚝 떨어지는 날이면 도로가 빙판이 되기 때문에 차가 올라오다가 저절로 후진하는 불상사를 맞게 되든지 아니면 내려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스키를 타게 되는 아찔한 상황을 맞게 될지 모른다.
첫해 그런 경험을 했다. 경차를 몰고 다닐 때 약간 곡선 길에서 갑자기 차가 나와는 상관없이 주욱 미끄러지는 것이 아닌가. 미끄러져 가는 곳이 왼쪽의 밭이 아니라 오른쪽의 작은 냇가 쪽이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냇가 쪽으로 가는 것도 그렇거니와 거기엔 전봇대도 있었다. 둘 중에 하나였다. 냇가에 처박히느냐 아니면 전봇대에 들이박히거나. 그 짧은 순간에 수많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왜 그 순간 그 기억이 스쳐 지나갔을까. 2009년에 운전 면허증을 땄다. 수련목회자 3년을 마치고 안수를 받을 수 있는 3가지 길 중에 하나였던 군부대 민간 성직자로 파주에 있는 부대로 파송되었다. 그 해 초보 운전으로 사고가 연거푸 세번 있었다. 한번은 주차하는 중에 옆에 있던 외제차를 아주 살짝 긁었다. 두 번째는 부끄럽지만 자유로에서 졸음 운전으로 앞차를 박았다. 서행 중이었기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대형사고가 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세 번째는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병사를 데려다주러 부대를 가는 중에 눈발이 날렸다. 그때도 곡선길에서 서행을 하고 있었는데 차가 갑자기 빙그르 하고 한바퀴 돌더니 반대편 차선으로 미끄러져 가다가 턱에 부딪혔다.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앞 범퍼는 물론 엔진까지 손을 봐야 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인명 사고가 없었기에 다행인 사고였다. 운전 면허증을 따고 나서 4개월 동안 초보 운전자가 겪었던, 그리고 겪어야 하지 말 운전 사고였다. 그 이후로 도로 위의 외제차와는 거리를 두었고, 졸음이 오면 반드시 졸음쉼터나 휴게소에 들러 머리를 식혔으며, 눈 오는 날에는 가급적 운전을 하지 않으려 했다.
농촌에 내려와서 세 번째 운전은 본의아니게 종종 하게 되었는데 농촌에서의 첫해 스키를 타는 아찔한 경험을 하는 순간에도 2009년의 눈길 사고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기에 어물쩡어물쩡, ‘어’ 하다가 ‘쿵’ 했던 사고에 대한 기억이 12년이 지난 지금도 눈오는 날의 운전은 매우 망설이게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눈길에 차가 냇가와 전봇대 쪽으로 미끄러져 갈 때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려고 애써 핸들을 반대편으로 돌렸으나 차가 가벼워서 그랬는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차는 끝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멈췄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차는 냇가에 처박히지도 않았고, 전봇대에 부딪히지도 않았다. 전봇대와 차 사이가 불과 20센티 정도였다. 아찔함이 안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식은땀이 걷히고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은 후 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뜻밖의 일로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했다. 그것은 전날 내린 함박눈을 마을 사람들이 밭과 냇가 쪽으로 열심히 쓸어모아 턱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 나를 구해준 것이었다. 그 이후로 집 앞의 눈은 내가 치워야 한다는 원칙을 지금까지도 깨지 않고 지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엊그제 설날 아침 흰 눈이 펑펑 내렸다. 오래간만에 맞아보는 눈이었다. 산과 들과 지붕에 소복히 내려앉은 눈을 바라보며 올해의 농사가 잘되길 기도했다. 겨울은 제법 추워야 하고, 제법 눈이 내려야 하는데 근래에 들어 이 두 가지가 줄어들고 있다. 추워야 병충해를 막고 눈이 내려야 가뭄을 해소하는 것인데 겨울이 겨울답지 않으니 양아치 딱지를 떼어가는 나 같은 농부도 벌써 한해의 농사가 걱정된다. 얼마 전 신문을 읽었는데 수상한 기후로 인해 조만간 딸기를 맛볼 수 없으니 비싸더라도 지금 마음껏 사 먹으라는 충격적인 기사였다. 원래 딸기는 5월에 먹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비닐하우스 생산으로 한겨울 혹은 초봄에 먹는 과일이 된 것도 못미더웠는데 그마저도 먹지 못할 과일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딸기 뿐이랴. 이제 곧 우리는 지구의 아픔이 우리의 밥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됨을 더욱 실감하는 날이 심심찮게 찾아올 것이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의 날씨, 올해의 계절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마당과 집 앞, 이웃의 경사진 도로, 밭으로 가는 길목까지 쌓인 눈들을 치웠다. 치우는 도중에도 눈은 계속 내렸다. 저만치 쓸고 돌아보니 몇 분 사이에 다시 쓸어야 할 만큼 쌓이고 있었다. 치우는 효과가 없어 보였다. 일전에 병사들이 내리는 눈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리는 악마의 똥이라고 울부짖었는데 갑자기 그것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 번 치우고 난 뒤 두어 시간 지난 다음 다시 한번 쓸었다. 날씨가 따뜻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설 명절을 쇠러 오고 가는 차량이 곤혹을 치를 뻔 했다. 그래도 새해 아침, 함박눈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고양이들도, 한라도 마당에 쌓인 눈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고 어떤 냥이들은 아예 눈밭에 굴러다니며 나에게 웃음꽃을 선사해주었다. 새해 아침 좋은 일을 마치고 들어와 떡국을 끓여 홀로 한 살을 맛있게 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