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김명섭 목사의 말씀학교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 하박국 1장1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0년 12월 31일 (목) 00:19:39 [조회수 : 2716]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 하박국 1장1절

 

1. 선지자 하박국

1) 하박국에는 널리 알려진 구절이 많다. (합2:4)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2: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합3:2)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합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유명한 요절에도 불구하고 잘 읽혀지지 않는 책이다.

2) 하박국의 본래적인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하박국이 기록된 시대적인 상황과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한다. 하박국이 예언했던 시대는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밖으로는 바벨론과 애굽이라는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했고, 안으로는 타락한 왕들의 폭정으로 백성들의 신음은 극에 달했다. 바벨론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정복한 후, 중동의 신흥강자로 떠오른 바벨론은 전통적인 강대국이던 애굽과 자웅을 겨룬다. B.C 612년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바벨론이 승리하고 이후 B.C 605년 남 유다를 1차 침공한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B.C 609년 ‘므깃도(하르 메깃돈, 아마겟돈)’에서 요시아 왕이 애굽왕 바로느고와의 전투에서 전사한다. ‘므깃도(하르 메깃돈, 아마겟돈)에서 요시아 왕의 죽음’이 유대인들에게 훗날까지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가 있다.(계16:16) 요시아 왕의 죽음으로 남 유다는 실질적인 국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B.C 587년 남 유다의 예루살렘성전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요시아의 아들과 손자에게 간신히 명맥은 유지했지만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므깃도(하르 메깃돈, 아마겟돈)에서 요시아 왕의 전사’는 단순히 국가의 멸망을 넘어 ‘하나님의 통치’가 종말을 맞는 사건, 곧 믿었던 하늘이 무너지는 신앙적인 절망을 의미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3) 열강의 침탈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요시아의 뒤를 이은 왕들은 우상숭배와 도덕적인 타락으로 백성들을 수탈했다. 요시아의 아들인 애굽이 세운 꼭두각시왕 ‘여호아하스’, 그의 동생 바벨론이 세운 꼭두각시왕 ‘여호야김’, 요시아의 손자 여호야긴, 그리고 마지막 왕은 요시아의 또 다른 아들 ‘시드기야’다. 남 유다의 마지막 왕들에게는 뚜렷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므낫세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한 이유를 성경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한다. (왕하23:25~26)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죄를 인함이라’ (왕하24:3~4)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 바...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남 유다 왕조의 멸망에 대해서 이미 건축초기에 사무엘을 통해 경고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윗(삼상12:14~15)과 솔로몬(왕상9:6~9)에게 누누이 거듭해서 엄히 경고하셨다. 한마디로 남 유다는 힘이 없어서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멸’한 것이다.


2. 선지자의 묵시

1) 묵시(默示)는 히브리어로 ‘본다’는 뜻이다. 환상 중에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는 것’이다. 헬라어 ‘아포칼립시스(apocalypse)’다. 덮개를 벗기다.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이다. 봉인을 풀다. 숨겨진 비밀을 폭로하다는 뜻이다. 계시(revelation)와 비전(Vision)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다.

2) 선지자가 묵시로 예언한 이유가 있다. 지금은 희미해서 확실하게 안 보이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시선은 현재가 아니라 장차 다가올 미래를 관측하는 망원경이다. 근시안이 아닌 선견지명이다.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이다. 묵시는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 사람의 예측이나 계산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는 통찰(insight, 洞察)이다.

3) 선지자(先知者)는 히브리원어로 ‘입에 거품을 물다’는 뜻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메신저다. ‘예언자(豫言者)’이자 대언자(代言者)다. 그래서 선지자는 자기 말을 해선 안 되고 더하거나 빼서도 안 된다. 선지자의 진정한 권위는 여기에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장차 행하실 일을 미리 내다보는 선견자(先見者)다. 본 것만 전해야지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은 것을 본 것처럼 전해서는 안 된다. ‘거짓 선지자’를 조심해야 한다. 미혹하는 말과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매우 어렵다. (마7장 20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나님의 언약인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 삶으로 드러난다. 선한목자는 목숨을 걸지만 삯군목자는 도망친다. 솔로몬의 재판처럼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실체가 드러난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 선지자는 흔하고 널렸지만 참된 선지자는 드물고 희귀하다. 


3. 선지자의 경고

1) ‘경고’는 히브리원어로 ‘무거운 짐’인데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뜻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반드시 죽는다.(공동체의 멸망, 개인의 죽음) 오직 회개하고 돌이켜야만 살 길이 열린다. 선지자를 통해 ‘미리 경고’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조들의 실패를 보며 앞서간 이들의 전철을 밟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돌이키는 회개를 끊임없이 촉구하시지만, 불행하게도 역사적인 과오를 어김없이 반복한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개를 통한 ‘구원’에 있다. 그래서 오래 참으신다. 하지만 영원히 참지 않으신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심판이 더디다고 방심하지 말고 아직 기회가 남아있을 때 빨리 회개하는 것이 지혜다. 또한 왜, 속히 심판하지 않으시는지, 더디다고 낙심하지 말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인내하실 것을 요구하신다.

2) 하박국이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는 두 가지다. 첫째는 ‘남 유다의 멸망에 대한 경고’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의를 행하던 왕과 패역한 백성들은 심판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남은 자’를 마침내 구원하신다.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이다. 타락한 예루살렘성이 무너져야 거룩한 새예루살렘성이 세워진다. 불의한 지도자의 통치가 끝장나야 신실한 지도자의 통치가 시작된다. 부패한 나라가 무너져야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한다. 때문에, 망하는 것이나 무너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다. 다만 철저한 성찰과 뼈아픈 반성으로 새로워지기 위해 힘써야할 뿐이다. 감리교회의 최고지도자인 감독회장이 사회법정에서 금권선거로 최종판결을 받고 줄줄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을 안타까워할 게 아니라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 하박국이 전하는 두 번째 경고는 ‘바벨론제국의 멸망에 대한 경고’다. 바벨론은 심판의 주관자가 아니다. (삼하7:14~16) ‘사람막대기와 인생채찍’ 곧 징계의 도구일 뿐이다. 남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도 심판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통치에 의한 ‘의의 최후승리’를 이루실 것을 선포한다. 

3) 오늘날 전대미문의 재난, 공포와 불안의 ‘왕관(corona)’을 쓰고 세상을 통치하는 코로나바이러스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직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한국교회의 위기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이라는 외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왕 되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물신숭배’를 일삼으며,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스스로 왕 노릇하는 ‘우상숭배’를 자행함으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의 결과다. 

김명섭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25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