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만나는 사람과의 첫 인사말은 "벌써 11월이다."로 시작한다. 인사가 끝나면 곧바로 이제 곧 크리스마스를 맞겠다는 말로 시간의 발 빠름을 아쉬워한다. 우스갯소리로 세월은 사람의 나이에 맞게 간다고 한다. 10대는 시속 10킬로, 20대는 시속 20킬로 ... 이런 식으로 하여 60대는 시속 60킬로, 그 이후는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달려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느새 시속 50킬로의 속도를 내고 있다. 더욱이 올해는 시작부터 코로나19로 그다지 일을 하지 못했고, 날씨도 예년과는 달라 농사도 설렁설렁 했음에도 불구하고 달력의 숫자는 1~2장으로 갈무리를 할 판이다. 게다가 농촌의 시간은 일전에도 말했겠지만 절기나 계절별로 가늠하기 때문에 나의 경우는 도시생활보다 훨씬 더 앞서가는 느낌이 강하다.

지난 토요일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산등성부터 내려온 가을이 절정을 이루며 눈과 입에 감탄사를 연발케 했다. 산에 둘러쌓여 이런 호사를 누리고 살면서도 이 또한 마음을 열고 눈을 열어 둘러보지 않으면 헛것이 됨을 이번에 다시 깨달았다. 날마다 잔치여도 잔칫날인줄 모르고 사니 나도 참 재미없는 사람이다. 뒤늦은 깨달음을 받아들이며, 찾아온 가을 손님들에게 연신 인사를 했다. 은행나무의 노란 잎은 가을 햇살을 받아 더욱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저수지 가로수로 심겨진 벚꽃나무는 꽃이었을 때도 예뻤지만, 빨갛게 변해가는 잎들도 참 예쁘다. 도로의 가로수인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은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땅을 덮었다. 플라타너스 특유의 떫떨음한 냄새를 좋아하는 나는 어릴 적 학교를 오고가는 길에 일부러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로 걸어다니곤 했다. 여름엔 시원한 그늘로, 가을엔 떨어진 낙엽의 바스락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낙엽을 모아 태울 때의 그 향기를 맡으며 가는 가을을 아쉬워했다. 이때만 해도 나에게 낭만이 있었다.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면 떠올려지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어책에 김현승의 시 ‘가을의 기도’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나오는 단골 시험문제라며 이 시는 외워야 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이 시의 ‘낙엽들이 지는 때~’에서 ‘낙엽들’을 플라타너스라고 생각하며 외웠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시는 플라타너스의 잎이 아니라 여러 나무들의 ‘낙엽들’이었음을 알았을 때, 왜 나는 그 낙엽들을 하나의 나무로 기억하며 외웠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지금과 같이 만만한 플라타너스 나무가 학교 교정에도 꽉 차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크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학생에게 ‘가을의 기도’는 이해하기 매우 어려웠다. 국어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시어 하나하나에 돼지꼬리 땡땡을 아무리 갖다 그려놓아도 시의 깊이를 이해하는 데는 내가 잘못 생각했던 낙엽들을 발견한 시간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다.

봄의 산은 노랗고 파릇파릇한 새순과 울긋불긋한 꽃들의 향연이 가득하다면, 가을의 산은 묵직하나 무겁지 않고, 화사하나 튀지 않은 형형색색이 조화를 이루면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 만약 내가 가을의 색처럼 옷을 입었다면 분명 촌스럽고 가벼워 어울리지 않았을텐데, 가을의 색은 계획을 짜서 그려놓았던, 마구 뿌려놓은 물감이었던 저마다 어울렸다. 시간에 따라, 빛에 따라 표현하는 모습도 갖가지였다. 가을의 모든 생명체들이 동면을 맞이하기 전까지 마지막을 향하여 자신을 온몸으로 표현해내는 듯했다. 시인의 말처럼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가을의 비옥한 시간을 가꾸는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그 비옥한 시간 앞에 내 영혼도 비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2년 전 심은 어린 묘목도 작년에는 지나가면서 “너도 꼴에 나무라고.”하며 웃었는데 올해는 제법 단풍 티를 내면서 가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을 절정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마음을 열고, 눈을 열어 맞이하는 이 순간이 내게는 절정처럼 보인다. 단풍잎이 붙어있는 동안, 찬바람이 한바탕 불어 마지막 잎새가 붙어 있기 전까지, 지금의 이 순간이 내년에도 있으란 법은 없을테니, 단풍 절정을 느끼며 가을 향연을 만끽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