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4일 영국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줄리안 브림(Julian Alexander Bream, 1933–2020)이 타계했습니다. 그는 모든 악기를 통틀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연주자였습니다. 대학시절 어느 날, 어떤 고민 때문이었는지 수업을 빼 먹고 하루 종일 기숙사 방에서 줄리안 브림의 연주와 영화 ‘디어 헌터’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존 윌리엄스의 ‘카바티나’를 주구장창 들은 날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떤 음악잡지가 매월 CD음반을 부록으로 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딸린 한 장의 CD를 통하여 그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수년간 기타 소리를 잊고 살았는데 그의 부고 소식을 들은 후 며칠 동안 내내 그의 연주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클래식 기타 음악은 듣고 또 들어도 쉽게 질리지 않습니다. 아마 모든 음과 음 사이에 여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작은 여백들의 본바탕은 삶입니다. 한손으로 코드를 잡는 순간 그 색깔대로 마디 안의 작은 세상이 정돈됩니다. 연주자의 반대편 손끝이 현을 튕길 때 모든 음들은 살아납니다. 코드를 집었던 손이 만들어 주는 비브라토만이 그 음을 살리려고 애쓸 뿐 튕겨진 음은 어떤 작은 집착이나 후회도 없이 그리고 자신의 소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강요하는 것 하나 없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튀어 올라 파르르 날개를 폈다가 시간과 공간, 삶과 꿈속으로 이내 사라집니다. 기타 소리는 늘 꿈꾸며 미소 짓습니다. 또한  지독한 삶과 현실마저 미소로 품어냅니다. 기타 소리가 울리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삶과 현실이 너무나도 충만해지고 아름다워지기에 영적이라고 하는 그 무엇도 감히 말을 걸어오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것이 거부되고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영적인 것이 자리를 비켜 줄 뿐입니다. 기타 소리가 울리는 그 순간만큼은 먼발치에서 역시 미소를 머금고 인간들의 삶을 응원하며 기타소리를 함께 듣습니다.

대학시절 유난히 기타 전공자들과 친했습니다. 음대에서 그들은 그들의 악기가 기타(Guitar)가 아니라 ‘기타 등등’에 해당하는 악기인 것처럼 일반 음대생들과 무언가 달랐습니다. 너무 추워서 시베리아라고 불렸던 그 기숙사에서 함께 살며 알게 되었던 정구 형은 가죽점퍼에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습니다. 기타리스트 권정구의 ‘바람이 전하는 말’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연주자는 그 악기의 성격을 닮아 가는 것 같습니다. 기타 전공자들은 대부분의 음대생들처럼 철없는 귀족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무언가에 경도되어 있거나 자신을 꾸미기 위해 늘 불안한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인간미가 있었다고나 할까요? 연습할 때도 성악이나 다른 악기를 연습하는 사람들은 그저 열심히, 경쟁적으로, 혹은 치열하게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기타 전공자들은 연습하는 동안에도 그저 그 순간 속에서 음악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기타는 언제나 그곳이 어디가 되었건 간에, 연주자가 누구이건 간에 연주를 하고 있는 그 곳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있었습니다.

현대 클래식 기타는 ‘스페니쉬 기타(Spanish guitar)’라고도 불리는데 기타라는 악기가 스페인 사람들의 문화, 그리고 그들의 감성과 너무나 밀접해 있고 19세기 후반 안토니오 데 토레스 후라도(Antonio de Torres Jurado)라는 기타 전문가가 그 기틀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유명한 타레가, 토요명화의 시그널로 쓰였던 ‘아랑후에스 협주곡’으로 유명한 로드리고 그리고 빌라로부스 등 위대한 작곡가들이 스페인, 특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의 감성이 충만한 기타의 명곡들을 남겼습니다. 그 때문에 20세기의 위대한 기타 연주자들 역시 안드레스 세고비아(1893-1987)나 로메로 일가처럼 대부분 스페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판소리의 깊은 맛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쉽게 누릴 수 없는 것처럼, 혹은 스페인과 유럽을 가로막고 있는 피레네 산맥처럼, 스페인 안달루시아 음악과 그 특유의 감성은 세계인들에게 있어 제대로 만끽하기 어려운 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대중적이고 세련되게 가다듬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후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팝음악이나 영화, 오페라나 뮤지컬 장르를 보면 영국인들의 그런 능력을 곳곳에서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클래식 기타 분야에서도 줄리언 브림이 바로 그런 일을 해냈습니다. 물론 그 어떤 기타의 대가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의 화려한 실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줄리언 브림 이후 클래식 기타는 스페인과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악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곡은 그라나도스가 작곡한 스페인 춤곡 중에서 다섯 번째 곡인 ‘안달루시아(Andaluza)’입니다. 안달루시아 북쪽 리나레스 출신인 기타의 장인 세고비아의 정통적인 연주와 줄리안 브림의 연주를 비교해서 들어보시면 제 설명을 단번에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19와 일부 몰지각한 기독교인들로 인해 답답했던 마음이었는데 안달루시아의 기타 소리를 들으며 화면으로나마 그곳에 가 보니 마음이 확 열리고 담담한 평화가 임합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길벗삼아 기어이 안달루시아에 다시 가보리라 결연한 다짐을 해 봅니다. 거장을 보낸 슬픈 마음으로 그의 기타소리를 소환했는데 제가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떠나는 길에도 그는 그의 말대로 우리에게 큰 선물을 안겨 주고 갔습니다.

"나는 음악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 이유는 성공하거나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충만하게 살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신조입니다. "

그가 우리에게 준 기쁨은 그의 음악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음악, 안달루시아의 기타소리가 만들어 낸 우리의 미소, 우리의 삶을 관조하는 옅고도 부드러운 미소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암담한 현실과 부끄럽고 답답한 교회의 상황 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만 잠시나마 안달루시아의 기타소리 덕에 행복했습니다. 당분간은 그의 기타 소리를 많이 의지할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마에스트로! 잘 가세요!

https://youtu.be/OY6aCYs473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