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편의점 앞을 지나다보면 계절의 변화를 느낄만하다. 겨울과 봄 사이, 계절보다 더 세밀하게 민감한 품목들이 눈에 뜨게 진열되었다가, 금새 사라지곤 한다. 며칠 전 졸업시즌 분위기였다가, 이내 발렌타인 특별행사로 바뀌더니, 곧 새 학기를 맞을 준비를 한다. 편의점 상품기획도 절기와 날씨와 소비자의 관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편의점 판매 전략에 따르면 새해에는 우선적으로 금연 물품과 다이어트 식품을 시선이 가장 쏠리는 곳에 배치한다고 한다. 그만큼 금연과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이다. 그런데 유효기간은 딱 3주간이라고 한다. 3주 후면 싫든 좋든 다른 상품에게 그 노른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것이다. ‘작심3일’을 일곱 차례 치루면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가 이미 드러난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흔히 ‘작심3일’이란 말은 그만큼 결심이 어렵다는 의미이다. 새해의식을 치루고 지금 달 반이 지났지만, 여전히 ‘작심3일’ 타령을 한다면 아직도 자신의 결심을 붙들고 산다는 뜻이니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냥저냥 해마다 한 번씩 썼다가 지우는 계획표가 아니라면 일 년 내내 작심3일을 반복해도 좋을 일이다. 120회만 반복하면 못 이룰 목표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도 새해가 오면 늘 바보가 결심하듯 다짐을 반복하곤 한다. 평소 숙제하듯이 기록에 대한 강박증세가 있는 편인데, 어리석게도 올해 하나의 과제를 추가했다. 이미 날마다 적어두는 작업량이 있음에도 또 하나의 항목을 늘린 것이다. 그나마 예전에 수첩에 적어야 했던 불편함과 달리 이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 메모가 가능한 스마트 폰의 장점 때문에 훨씬 수월해졌다.

  ‘적자생존’이란 말도 있지 않던가? 적는 자, 곧 기록하는 자가 생존한다는 말이다. 최근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푼 주역들은 모두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다. 그것이 덜미를 잡히는 계기가 되고, 혐의를 확증하는 증거가 되고, 진실을 증언하는 증인 역할을 하였으니 부정적인 의미든, 긍정적인 의미든 ‘적자생존’한 이들은 역사적 구실을 다한 셈이다.

  이미 고인이 된 박흥규 목사는 생전에 내게 전화를 할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지곤 하였다. 그는 다분히 공격적인 말투로 다짜고짜 묻는다. “네 사는 얘기를 들어보자.” 그럴 때면 영락없이 선생님의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힌 초등학생처럼 버벅거렸다. 질문이 어려운 것은 아닌데 요령껏 즉석으로 답을 하지 못했다. ‘사는 얘기’를 말할 만큼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그는 늘 제대로 살도록 압박하던 좋은 선생님이었다.

  어느새 4주기가 다가오지만 나는 아직도 박 목사님의 질문을 듣곤 한다. 그래서 스마트 폰의 메모장에 ‘네 사는 얘기를 들어보자’라는 항목을 정하고 매일 내가 겪은 하루의 얘기를 짧게 적는다. 그것이 내가 날마다 삶을 성찰하는 방식이 되었으니 ‘적자생존’하는 셈이다.

  또 하나의 기록주제는 ‘오늘 내가 뭘 배웠지?’이다. 매일 읽고, 보고, 배운 것들 중에서 한두 가지를 기록해 두는 것이다. 천기누설 수준의 내용은 못되고 다만 시시한 정보에 불과하지만 새 단어, 낯선 시각, 통계, 상식, 명언명구 등 챙겨둘 배울 거리는 차고도 넘친다. 종종 눈여겨 둘 배움이 없을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365일 모든 날들이 새로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여러 해를 반복하다보니 보물창고가 따로 없더라.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처지의 사람이라면 권하고 싶은 ‘적자생존’ 습관이다.          

  올해 추가한 세 번째 기록 작업은 그 주제가 ‘귀 기울여 건진 한 마디’이다. 평소 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남의 말에 귀 기울여 듣지 못한다. 그런 반성 끝에 하루 동안 남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서 ‘딱 한 마디’를 선택해 기록하고, 그 말의 배경과 의미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두는 식이다. 이를 ‘작심 50일’쯤 반복하다 보니 어느 새 남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게 되었고, 상대방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를 돌아보게 되니, 이를 계속한다면 성공할 아이템이 될 것 같다. 평소에는 귓등으로도 듣지 못하고 놓칠 것이 뻔했던 한 마디들이었다.

  “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내게 도움을 청한 고3학생)
  “새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호흡이 거칠고 발자국이 어지럽습니다”(교인 기도 중에서)
  “쫌 서운할 뻔했어요”(둘째 아들)
  “제가 아주 겸손해졌어요”(대학원 시험에 낙방한 청년)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노랫말 가사)
  “열 번 망설였다”(부탁하는 친구)

  전에는 그냥 흘려들을 이야기지만, 이젠 매일매일 봄소식 같은 따듯한 한 마디씩 건진다. 그리고 오늘은 어떤 메시지를 귀에 담아두게 될까 기대를 한다. 그런 울림과 떨림이 나를 ‘적자생존’ 세 가지 길에 나서게 이끈다. 그렇게 소소한 삶이 어느새 겨울을 벗고 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