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회담 재개의 낭보가 들려왔다. 지난 일요일에는 남북의 실무자들이 마주 앉아 곧 있을 남북장관급 회담의 실무회의를 한다고 해서 온 국민이 관심을 갖고 뉴스를 주시하였다. 실무자 회담의 결과가 국민들의 기대를 부응하지 못한 부족한 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국민들은 전쟁위기 해소를 위해 좋은 출발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관급 회담이 당국회담으로 바뀌고 회담 당사자의 격 혹은 급이라는 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급기야 회담 하루 전날 전격적으로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비단 나만의 멘붕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멘붕이었을 것이다.

실무자 회담을 한 이튿날인 월요일에 대북 인도지원사업을 하는 단체들의 회의에 참석하였다. 3년 동안 꽉 막힌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는 계기를 맞아 내 딴에는 회의에 나온 사람들의 분위기가 제법 들떠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평상시보다 더 차분하고 오히려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왜 이러냐고 물으니 ‘좀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해본다. 하긴 그들은 십수 년 동안 남북을 오가며 인도지원 사업을 해왔던 경험이 있으니 단편적인 한두 가지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지는 않을만한 연륜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런 파국을 맞자 어떤 인도지원사업단체 실무자는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무튼 기가 막힌 일이다.

이런 황당한 시점에서 이 결과를 놓고 문제점을 짚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만 아직 완전히 파국을 맞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남북간 회담의 미래를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남북 대화 시도는 한반도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등 연관국들의 압력과 6자회담이라는 큰 틀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미국은 앞에서는 조선의 비핵화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비핵화 대안이 없는 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내부적으로는 비핵화를 포기하고 비확산으로 기조를 바꾼 것으로 분석된다. 인공위성까지 개발하여 대륙간 탄도탄으로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도 있는 조선의 핵무기도 위협이기는 하지만 미국과 대치점을 이루는 이란 등의 중동국가로 조선의 핵무기가 유입되는 것이 일차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으로 비확산에 주력하고 있으며 실제로 몇 차례 이런 뜻을 전달하는 북미간 물밑 접촉이 있었던 정황이 포착되었다.

조선의 오랜 혈맹이라고는 하지만 개발드라이브에 올인한 중국으로서는 조선이 뜨거운 감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도 조선을 모른 체하고 미국과의 공조로 압박을 하기엔 부담이 크지 않을 수밖에 없다. 조선이 3차 핵실험을 했을 때 중국도 매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미친 개라도 우리집 앞을 지키게 하는 것이 좋다’는 말로 조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속내를 비쳤다. 동북아를 통해 목을 죄어오는 미국을 전방에서 막는 역할을 해주는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국으로서는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다. 오히려 중국은 조선이 미국과의 협상이 잘 돼서 미국쪽으로 넘어가게 되는 상황을 더 우려하고 있다. 그래서 완전히 끌어당기지도 않으면서 또 완전히 내치지도 않는 전략으로 조선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은 국내적 상황과 연관돼 있기는 하지만 조선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시도하면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확장하려고 하고 있다. 남포에 대규모 산업단지를 구성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미국과 한국은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나라이건 정의라는 막연한 개념으로 외교를 하지는 않는다. 오직 자국의 이익이라는 목적만이 동력이 될 뿐이다. 국제정치에서 정의는 덧붙이면 좋을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입지와 목표는 무엇인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의 문제가 강대국들의 입맛과 자국의 이익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형국인데 정작 당사자 중 하나인 한국은 그저 느긋할 뿐이다. 조선의 막대한 자원은 헐값으로 중국으로 팔려나가고 미국은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물밑 접촉을 통해 조선과의 관계를 맺으며 일본도 한반도의 위기를 어떻게 자국의 이익으로 전환할 것인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정작 한국은? 기싸움으로밖에 안 보이는 골목대장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이번 대화의 출발점은 사실 조선의 제안이다. 개성공단을 폐쇄시킨 장본인은 분명 조선이다. 그러나 전쟁시 개성공단에 체류 중인 기업인들이 억류될 우려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화근이 되었고 조선은 그렇다면 다 나가라, 억류하는 일 없게 해주겠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이렇게 시작된 개성공단 폐쇄는 어쨌건 양측 모두의 손해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회복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여기에 6자회담을 위해서는 먼저 한국과의 회담과정을 거칠 것을 주문하는 미국의 요구에 어떻게든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처지에 놓인 조선이 회담의 제안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제안을 받는 한국은 개성회담이 아닌 판문점회담으로 역제안을 했고 조

선은 이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가 최근 며칠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우선 일방적으로 회담을 무산시킨 일차적인 책임은 조선에 있다. 조선이 먼저 회의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설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전적으로 그 책임을 떠맡길 수는 없다. 그리고 항상 ‘통 큰’ 것을 좋아하는 조선이 ‘속 좁은’ 모습을 보인 것도 그동안의 큰소리가 허풍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조선은 조선에서 나름대로 반성하고 나는 한국의 태도에 대해서 몇 가지 지적질을 하고 싶다.

1. 조선 통일전선부 부장이 한국 통일부 장관과 같은 급은 아닌 부총리급이다.
일단 남과 북의 행정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애매하기는 하다. 그러나 당 중심 체계의 조선에서 통전부장은 당 대남비서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장관급보다는 더 높다는 것이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게다가 그동안의 남북회담 전례는 통전부장이 통일부장관의 파트너로 회담장에 나선 적도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결 같이 통전부장이 회담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조선으로서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내 말 안 들으면 회담 안 하겠다’는 강짜이다.

2. 그동안의 관행이 잘 못됐으니 이제부터라도 바로 잡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주장은 시대에 맞지 않다.
이미 10년 이상 교류하고 왕래한 역사가 있다. 그동안 아무 문제없이 잘 회담을 하고 협의를 했는데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교류가 없이 지냈다고 지난 역사를 깡그리 뒤집고 전혀 새로운 판을 짜서 하겠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국제적 스탠더드 운운하는데 만약 그 격을 맞추기 위해 새로운 판을 짜기를 원한다면 그것 역시 기존의 틀 안에서 협의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정말로 통전부장과 통일부장관이 마주하고 싶었다면 이번 회담에서 무리한 고집을 피울 것이 아니라 일단 만나고 또 계속 만나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상식적인 진로이다.

3. 청와대의 ‘굴욕 굴종 강요’ 발언은 지난 남북교류 역사의 책임자들을 바보로 치부하는 교만이다.
청와대는 남북회담에 통전부장이 통일부장관의 대화상대로 나오지 않는 것을 놓고 굴욕과 굴복을 강요하는 처사라고 했다. 그러면 그동안 아무 문제없이 조선과 상대했던 회담 당사자들이나 그것을 용인했던 전대 대통령들은 모두 조선에 굴욕하고 굴종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에이 썅~’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당당하고 올곧은 대통령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조선은 십수년 간 한국에 대해 굴욕과 굴복을 강요한 깡패집단으로 밖에 안 본다는 말이 아닌가! 이런 관점으로 어떻게 한반도의 신뢰프로세스를 말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존의 관례를 거부하면서 국제적 스탠더드를 주장한다면 이는 조선에 대한 굴종과 굴복 강요가 아닐까?

4. 남북 간에 벌어진 접촉 과정에 대하여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국민들은 제한된 정보밖에 접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남북 문제 같이 민감하고 안보에 민감한 부분은 통제가 더욱 심각할 것이라고들 예측한다. 그러나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 국가의 국민으로 자국의 이익을 견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익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바로 알 권리이다. 국가를 책임진 집단의 논리에 무작정 끌려가서는 안 된다. 국민들의 교육수준도 매우 높아졌다. 이제는 올바른 정보를 접한 국민이 스스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무엇이 옳으면서 국가의 이익을 위하는 길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충분하다.
이번에 개성공단 사태에서 정부는 왜 조선이 개성공단 기업의 완제품과 자재를 반출하지 못하게 하느냐며 완제품과 자재를 반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은 기업인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은 한참 이슈가 되자 그제서야 공개되었으며 청와대까지는 보고가 되지 않은 것 같다는 구차스러운 변명으로 일관했다. 금강산 관광 관련해서도 한국 정부는 관광객의 신변 안전 보장을 문서로 해달라고 조선에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지만 얼마 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조선은 이미 2010년에 문서로 합의서 초안을 만들어 남측에 전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런 적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고 그런 내용을 알 리 없는 국민들은 조선을 비난했고 금강산 관광 재개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리 적대적인 위치에 있다 해도 맞는 것은 맞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무조건 적대세력으로만 보려고 하는 왜곡된 관점이 있는 사실 자체도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악의적으로 왜곡되고 감춰진 정보들만을 접하는 국민들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적개심만 더욱 키워가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는 자신들의 입장을 선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조선을 악으로 규정하려는 얄팍한 생각을 버리고 이번 일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모든 과정을 국민에게 공개해야 한다.

5. 박근혜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 대상은 조선만이 아니라 한국도 포함되며 MB의 ‘비핵개방 3000’과 다르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회담준비 과정에서 남북의 회담 당사자의 격이 맞지 않는 것은 신뢰가 없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박 대통령은 조선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신뢰라는 말을 입데 단다. 그런데 그 말한 내용의 전후 문맥을 따져 보면 ‘조선이 지금 보이는 태도로써는 한국은 절대로 조선을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 대부분이다. 즉 조선이 한국의 뜻에 따르지 않는 것이 신뢰가 없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이 조선에 보여준 것은 신뢰할 만한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신뢰 프로세스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내 맘에 들지 않으니까 너는 신뢰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면 어떻게 신뢰를 쌓을 계기를 갖게 될까? 신뢰라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어느 한 쪽이라도 신뢰를 보이면 상대방의 신뢰는 생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가동을 위해서 북의 신뢰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남의 신뢰도 이야기해야 한다. 즉 한국은 조선에게 신뢰감을 주었는가 하는 말이다.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그리고 지금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이명박 정권이 내세운 ‘비핵개방3000’정책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비핵개방3000은 조선이 한국 이명박의 주장에 따라서 핵도 포기하고 개방도 하면 국민소득 3000달러로 만들어주겠다는 오만방자한 정책이다. 세상에 그럴 나라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자존심 강한 한민족이 말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나 비핵개방3000은 결국 ‘내 말 안 들으면 너랑은 상대 안 해’ 하는 것이 핵심이다. 박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교되는 것을 매우 질색한다고 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다를 바가 전혀 없게 된다. 물론 그 결과도 마찬가지이다. 자신 말대로 굴종과 굴복을 요구하는 신뢰가 아닌 상호간 동의할만한 신뢰의 틀을 갖지 않는다면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이명박의 비핵개방3000처럼 비웃음만 사게 될 것이다.

어제 저녁 이후로 나는 멘붕과 분노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남북 모두에게 엄청난 실망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 더 많은 책임을 묻고 싶다. 한국의 국력과 국격, 국제적 위상으로 그처럼 유치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조선의 군기를 제대로 잡고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생각인가 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골목에서 꼬마들이나 하는 소리다. 국가와 국가가 만나는 자리에서는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소리다. 아니, 생각조차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신뢰 프로세스이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는지도 묻고 싶다. 설령 격이 맞지 않는 상대가 나왔다 하더라도 한국 정부와 통일부 장관 이하 직원들은 그런 상대를 구슬리고 협상해서 필요한 것을 얻어낼 자신이 그렇게도 없나? 조선 콤플렉스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국력도 강하고 가진 것도 더 많고 국제적인 감각도 더 많은 한국이 왜 조선 앞에만 서만 그렇게 작아지는 것일까? 그래서 샅바싸움이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다는 듯이 보인다. 말 안 듣는 녀석은 궁둥이라도 때려서 버릇을 고쳐 놓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방식이다. 고수들은 폭력이나 기싸움이라는 좋지 않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것을 관철시킨다. 그런데 폭력적인 방법 외에는 전혀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능한 이들이 국가의 고위공직에 앉아 있다는 것이 그저 한심스러울 뿐이다.

박 대통령의 방중, 6.15 기념일이 다 지나야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한민족 구성원들은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의 터널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답답하고 안타깝고 화가 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아무 것도 안 한다는 비난을 받을까봐 하는 척이라도 하다가, 기어이 파토를 내는 것 같은 이번 회담이, 박 대통령이 ‘회담을 위한 회담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 상황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하다. 길지 않은 인생인데 그 절반을 분단과 대결이라는 불안과 공포로 살아왔다. 나는 평화와 통일에 목마르다. 그리고 내 새끼들은 목마르지 않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