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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3월 21일 (목) 12:42:31
최종편집 : 2013년 03월 21일 (목) 19:57:18 [조회수 : 20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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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하느님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어머니 빈 젖", "야훼와 부처가 그 안에 있었으니"
가시기 며칠 전
풀어 헤쳐진 환자복 사이로 어머니 빈 젖 보았습니다
그 빈 젖 가만히 만져보았습니다
지그시 내려다보시던 그 눈빛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처연하고
그처럼 아름다웁게
고개 숙인 꽃봉오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야훼와
부처가 그 안에 있었으니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도 내가 다시 매달려 젖 물고 싶은 당신
내게 신은
당신 하나로 넘쳐납니다
(복효근·시인,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풀어 헤쳐진 환자복 사이로 언뜻 내비친 쭈글쭈글하고 볼품없는 "빈 젖"을 시인은 "그렇게 처연하고 그처럼 아름다웁게 고개 숙인 꽃봉오리"라고 고백한다. 힘들고 고단했을 어머니의 한평생을 넌지시 말해 주는 구슬프고 쓸쓸한 느낌의 "빈 젖"이 오히려 시인의 눈에는 세상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꽃봉오리"로 보였나 보다.
그리고 이 고백은 "내게 신은 당신 하나로 넘쳐납니다"라는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랑고백으로 이어진다. "당신 하나", "야훼와 부처가 그 안에 있었"던 "빈 젖"으로 사랑을 가르쳐 준 어머니의 거룩한 존재 하나면 된다는 거다. 둘도 필요 없다는 거다.
이뿐만이 아니다. 시인의 어머니는 "빈 젖"의 말없이 성스러운 모습을 통해 시인의 마음속에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도 내가 다시 매달려 젖 물고 싶은 당신"으로 살아 있다. 어머니의 육신은 지상을 떠나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빈 젖"으로 한평생을 마무리하고 가신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의 추억은 길이길이 남는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기막히게 가슴 저린 어머니의 부활이요, 시인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빈 젖"의 되살아남이다.
"야훼와 부처"를 얘기하는 걸로 보아, 시인은 기독교인이나 불교 신자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비록 나는 야훼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이지만, 시인의 상상력에 기대어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어머니의 '빈 젖'에서 '신'을 느끼는 시인 앞에서 기독교니 불교니 논하는 것은 부질없다. 정말 소중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어머니의 존재요, 또 어머니의 모습에서 '신'을 소스라치게 발견하는 시인의 순수한 마음이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아낌없이 내주며 한평생을 사신 어머니의 '그처럼 아름다웁게 고개 숙인 꽃봉오리' 하나면 '내게 신은 당신 하나로 넘쳐납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은 신앙고백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사랑고백이다. 이런 사랑고백이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은 신앙고백은 무의미하다."
2. "원래 종교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젖은 우리의 하나님이었다"
주스나 콜라처럼
마시는 것이 아니다
젖은 먹는 것이다
이 오래고도 유정한 食糧
언젠가 '아프리카 참상'이란 보도사진전에서
정강이뼈가 유독히 쾡한 눈의
덩치 큰 한 사내아이가 살갗이랄까 껍질이랄까
ㅡ아무튼 모든 살점이 육탈해버려서ㅡ
머리 위로 올라붙은
그야말로 피골상접한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
아기는 엄마의 바닥을 빨고 있었고,
엄마는 자기의 육신의 맨 마지막을
아기에게 내어 물리고 있었다
참혹한 것 넘어서는
이 崇嚴함
원래 종교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젖은 우리의 하나님이었다
(상희구·시인, '젖')
"모든 살점이 육탈해" 버렸을 만큼 "피골상접한 엄마의 젖"을 아프리카의 한 아기가 빨고 있는 "참혹한" 모습의 사진을 보고 시인은 한순간 전율한다. 우리도 가끔 접해 눈에 꽤 익숙해진, 그래서 우리 뱃속으로 따뜻한 밥을 넣으면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모습.
그런데 시인은 "참혹한 것 넘어" "崇嚴함", 즉 숭고한 거룩함을 느낀다. 너무도 "참혹한" 모습이 "崇嚴함"으로 승화된다. 어떻게? "자기의 육신의 맨 마지막"을 배고픈 아기에게 주고 싶은 엄마의 기막힌 사랑, 그리고 바싹 말라붙은 엄마의 "젖"을 악착같이 빠는 아기의 끈질긴 생명 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결론적으로 놀라운 말을 한다. 아니, 폭탄 선언을 한다. "원래 종교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젖은 우리의 하나님이었다."
무슨 말인가? "젖" 앞에서, 눈물겨운 삶과 사랑 앞에서 함부로 종교를 지껄이지 말라는 거다. "주스나 콜라처럼" 여유 있게 "마시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해 "먹는" 것, 세상의 모든 엄마가 피붙이 자식에게 기꺼이 거저 주는 "이 오래고도 유정한 食糧", 사랑과 정(情)이 듬뿍 담긴 생명의 식량, 이 젖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거다. "종교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젖은 우리의 하나님"이었으니, 종교보다 앞서고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게 젖이요, 또 "하나님"은 "종교"와 전혀 무관할 수도 있다는 거다.
기독교의 전통 교리 잣대를 들이대면, 시인의 이 거침없는 상상력, 이 노골적인 고백은 발칙하기 짝이 없고 정신 나간 사람의 헛소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젖"에 빗대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시인은 정신병자나 믿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 심지어 신성 모독의 "이단자"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시인의 단순 명쾌한 선언에서, 내 머릿속 어딘가의 하느님 의식이 오히려 확장되고 깊어지고 순수해지는 느낌이 든다. 늘 머릿속에 맴돌면서도 '정말 그분의 존재는 내게 뭘까?' 하는 의문이 나이 들수록 점점 더 고개를 쳐드는 하느님이 내 가슴속으로 살짝 옮겨오시는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
외할머니께서 여든 셋 연세에
내 곁을 떠나신 지
어느새 스물 두 해가 흘렀다
시집온 지 겨우 몇 년만에
청상과부 되시어
달랑 외동딸 하나 키우시며
긴 세월 많이 외로우셨을 할머니
평생을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위해 밥 짓고 빨래하시느라
늘 고단하셨던 할머니
그냥은 써서 못 마시겠다며
설탕 한 숟가락 넣은
막걸리 한 사발을 놓고서도
몇 번이고 쉬엄쉬엄 나눠 드시던
나의 외할머니.
1991년 1월 17일 저녁 어스름
할머니가 현관 밖 차디찬 계단에
쓰러져 계신 걸
아내가 발견했을 때도
할머니는 마당에 널어 두셨던
하얀 광목 한 보따리를
가녀리게 야윈 품에
보석처럼 끌어안고 계셨지
세상을 하직하시던 그날도
우리 위해 저녁밥 지으셨지
단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싸늘한 육신으로 돌아가신 할머니
할머니가 영영 떠나셨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늘 주무시던 그 자리에
밤마다 이부자리 펴 드렸네.
돌(石)처럼 한평생 변함없이
우리를 기르고 보살펴 주셨던 할머니
고단한 살림살이 지탱하시느라
늙은 말(老馬)처럼 야위셨던
당신의 그 모습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성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말없이 머물다 가신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할머니.
(정연복, '석노마石老馬 할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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