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하느님, 내가 느끼는 하느님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신 존재 증명?

1982년 신학을 처음으로 공부하면서 조직신학 개론 시간에 '신 존재 증명'이라는 것을 배웠다. 약간 재미는 느꼈지만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던 걸로 기억된다. 이러이러하니까 하느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는 기독교 변증론의 일부가 아니었나 싶다.

반대로, '신 부재 증명'도 가능하지 않을까. 상식적으로 따져보면 신 존재 증명보다 부재 증명이 훨씬 더 쉽고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 하느님이 계실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관자인 하느님이 계신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정론(神正論)' 문제들이 우리 삶의 도처에서 제기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존재하든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일까? 논리적으로는 그럴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교회에 다닌 지 어느새 사십 년이 되었고 어쩌다가 신학도 삼십 년 가까이 공부했지만 솔직히 어떻게 답해야 할지 자신이 없다. 아무래도 내게서 하나님은 명멸(明滅)하는 분 같다. 어느 순간 내 맘속 하늘에 떠 있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별 같은 존재.

마더 테레사와 이해인 수녀는 영성의 최고봉에 다다랐으면서도 마치 하느님이 자신의 내면에서 사라진 듯한 "존재의 어두운 밤"을 경험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지? 신앙이 미천한 내가 그 고백의 깊은 뜻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느낌이 온다. 어쩌면 하느님이란 본래 그런 분이 아닐까?       

나는 성격상 논리적인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물을 이해하는 데에도 이성보다 감성에 의존하는 편이고 하느님에 대한 이해 또한 그렇다. 온 우주 만물의 창조자인 하느님이 계신가 하는 거창한 문제를 안고 씨름할 자신은 없고, '하느님이 내 삶 속에 살아 계신가' 하는 소박한 질문이 내게는 오히려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2.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신학의 명언들 중의 명언이 아닐까. 또 사실 성경에서는 하느님과 사랑을 거의 동일시하는 구절들이 더러 있는데, 이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내 마음에 사랑이 꽃필 때, 너와 나 사이에 사랑의 강물이 흐를 때,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랑의 기운이 샘솟을 때, 그때 하느님도 그 사랑 안에 계신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세상의 어느 한 사람이나 나무 한 그루, 이름 없는 풀꽃 하나를 순수하게 사랑할 때, 나는 하느님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랑으로 나도 살고 동시에 하느님도 살리는 것이 아닐까. 

감성이 풍부해질 때, 그래서 왠지 마음이 맑고 착하고 겸손해질 때, 내 맘속에도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듯하다. 그러나 감성이 메마르고 마음의 문이 닫혀 자신과 남들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이기적이 될 때, 하느님도 내 맘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종종 경험한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셀 수 없이 많다.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과 교회들도 무척 많다. 하느님의 사랑을 널리 알리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성직자들도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이 땅에 사랑은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이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3. 아내에게서 배우는 하느님

1989년 6월, 선한 눈빛에 한눈에 반해 6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고 스물 세 해 동안 곧잘 살아왔다. 아내는 모태신앙에 꽤 보수적 신앙을 가지고 있고 나는 틀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자유롭고 어쩌면 매우 진보적 신앙을 가졌지만, 지금까지 신앙 문제 때문에 심한 갈등을 겪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뜻에 맞추어 살려고 무척 애쓰는 아내와 하느님이 계신 듯 안 계신 듯 마음 편히 살아가는 나.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아내의 성실한 신앙생활 모습을 고스란히 닮아 가는 딸과 비교적 나와 비슷한 신앙 색깔을 띠어 가는 아들. 이렇게 우리 가족은 양편으로 갈리면서도 서로를 좀더 아끼고 이해하려 애쓰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래도 내가 이만큼이라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내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씩 배우고 있고, 또 아내를 보면서 '하느님은 계시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신앙을 좀 닮아 보라고 고집을 피우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에 기대어 아름답고 선한 삶을 이어가는 아내가 곁에 있는 한, 나도 죽는 날까지 하느님을 내 삶의 더없이 소중한 보물로 모셔야 할 것 같다.

4. 사색의 계절에

어제는 태풍이 오고 비바람 세차게 몰아치더니 오늘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다. 마치 하느님의 마음 같다. 그리고 내 맘속에도 그런 하늘 하나 폭 담고 싶다. 차갑고 딱딱한 논리 속의 하느님이 아니라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성 속의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

사색의 계절에 이따금 나의 신앙을 사색해야 하리라. 하느님은 지금 내 삶 속에 살아 계신가 죽어 있는가? 나는 하느님의 존재 영역을 넓혀 나가는 편인가, 아니면 나의 사고방식과 존재방식과 생활방식 때문에 오히려 하느님의 존재 영역이 좁아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때문에 하느님이 살고 또 하느님 때문에 내가 사는 변증법적 순환 속에, 날로 조금은 더 사람다워지는 멋진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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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족 인디언의 구전 기도문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