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을 읽으며 나는 세계관이 바뀌었다. 아니, 인생관이 비로소 확립되었다. 나는 좌파가 되었다.
돌아보면 전두환 정권 당시의 사회적 환경도 크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옛 성현 공자는 십 오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삼십에 바로 섰다고 했는데 나는 이십대 후반 2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생관이 확립되었으니 일면 부끄럽기도 하다.

1980년 5월의 광주로 인해 전두환 정권 내내 많은 대학생들은 일종의 ‘빚진자’라는 의식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공유하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학교보다도 최루탄을 마시며 거리로 나서는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을 동시에 하던 나로서는 몸조심을 해야 했다. 데모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구속이라도 되면 졸업장이고 직장이고 다 포기해야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후배들로부터 군대를 마치고 나오더니 비겁해졌다는 말을 들어도 할 수 없었다. 특히 글을 쓰는 후배들은 세상이 이처럼 불타고 있는데 ‘자연은 아름다워라’ 타령이나 하고 있다며 비웃곤 했다.

아무튼 데모에 참가하는 대신 주로 책을 읽던 나는, 열 몇 권의 장길산을 모두 쌓아놓고 읽던 어느 날, 운명적(?)으로 다음의 장면을 만났다.

“.....또한 그대가 주인으로 섬기는 양반들은 우리가 알기로는 우리 같은 천민의 적이니 네가 받았다는 가엾은 권한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나는 굶주리고 핍박받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일어난 군사의 장수이다. 이미 작은 활빈행으로 평생의 직분을 세워 심지를 굳혔으니 은혜란 너희들에게 입은 것이 아니라 강산에 즐비한 약한 백성들로부터 입은 것이다. 내가 피를 뿌려 땅 위에 쓰러질지라도 저들에게 입은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이다. 죽기로 마음을 정하였으니 사로잡으려 애쓰지 마라.....”

장길산의 부하인 마감동이 토벌대 장수 최형기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깊은 감동에 한동안 시간을 잊었다. 이윽고 나의 소심함과 무사안일, 글을 쓰는 자로서의 무책임성에 대한 뼈아픈 각성이 몰려왔다. 위와 연결되어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계엄군에 무참히 짓밟히고 죽임을 당한 광주시민들, 건설회사가 동원한 폭력배들에게 맞아 허리가 부러지는 재개발지역 철거민들, 하루 열여섯 시간 넘게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 근로여성들, 우연히 현장을 지나가다 경찰에 끌려가 물고문 끝에 거짓으로 범죄자백을 해야 하는 무고한 시민들, 민주사회를 열망하며 거리로 나섰다가 빨갱이로 몰리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때, 파티를 좋아한다는 전두환이 소위 통치자금을 바치는 재벌총수들과 어울려 십팔번이라는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를 부르고 있을 때, 경찰서 한구석에서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절규를 하던 여성 근로자가 성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하다가 죽인 당국자가 ‘탁자를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코미디 같은 발표를 했을 때, 민주주의를 하자며 데모에 나선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좌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타고난 소시민이었고 유약한 글쟁이였다. 데모대의 중심에는 서지도 못했고 민주적 개헌을 하자는 문인들의 서명운동에도 알량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넥타이 부대가 데모에 나설 때 겨우 꽁무니에 참여를 했으며 그보다는 숨어서 전단을 만들고 격문을 만드는 일로 겨우 면피나 하고 있었다.

세월은 도도히 흘렀다. 그 사이 김대중, 노무현의 민주정부가 들어서기도 했고 IMF 사태로 불리는 경제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드디어 세계 십 몇 위 교역량이라는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니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좌파의 한사람으로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대적 요구에 주목한다. 한국사회에 고착화 되어가는 대기업 독점 경제구조의 극복을 위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외치는 이들에게 힘을 모아주고 싶다.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이라는 법치주의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아냥거림으로 대치된 계층간 갈등을 개선하는 일에도 힘을 보태고 싶다. 거리를 방황하는 실업자들과 조기 은퇴자들, 차별받는 비정규직원들, 가정 파괴에 따른 소년소녀 가장들, 의지처가 없는 독거노인들에게도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더 나아가 이 시대 좌파들은 같은 민족으로서의 북한 문제를 생각한다. 대명천지에 삼대에 걸친 권력세습으로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북녘 땅, 스물 몇 살 젊은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박수를 쳐대는 북녘의 권력층들을 보면 그 비루함에 내가 다 한숨이 나온다. (하긴 얼마 전 한 재벌회사에서는 ‘회장님은 신과 동격이며 절대충성의 대상’이라는 문서가 돌려지기도 했다니 인간의 심성이란 남북이 무엇이 그리 다르겠는가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전언을 되새겨 볼 때 우리가 참여할 일은 과연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또한 저 북한의 수용소에서 맞아죽고 굶어 죽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회복을 위해서도 힘을 모아야겠다.

그리고 나에게는 한가지의 의무가 더 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세상을 사랑하되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다. 내가 차별이 없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에 동참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기 위함이다. 진정한 평화와 공평과 정의는 예수님께만 있다. 기독 성도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뒤에 펼쳐질 온전하고 영원한 나라의 백성으로의 삶을, 오늘, 이 땅에서 미리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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